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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렛츠리뷰] 창작과비평 2010 봄호

by parallax view 2010. 4. 5.
0. 렛츠리뷰가 너무 늦었다. 책을 흡수하는 속도가 더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의 나태를 탓한다. 그럼에도 쉬이 넘어가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건 밝혀야겠다. 창비의 정치평론은 내게 좀 부담스럽다. 가능한 표지의 목차별로 하나하나 짚어보겠다.

1. 특집) 3대 위기를 넘어, 3대위기론을 넘어 : 전병유의 '경제위기를 넘어 민생위기 해결로'를 제외하고는 김종엽, 이남주, 백낙청 모두 '진보대연합'의 구성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전병유 역시 국민경제상 위기를 환기시킴으로 사실상 진보대연합 주장의 논거가 되고 있다. 그 글 역시 마찬가지선상에 있다고 봐야 할 게다. 진보신당의 5+4합의 거부라는 '사건'이 있기 이전에 씌여진 글인 만큼, 현실권력의 속도와 관계없이 반MB와 반한나라당이라는 '당위'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당위다. 지방선거가 이제 2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현 정부의 4대강 개발과 민생 없는 민생경제정책, 민주주의 없는 민주주의를 막겠다는 기본적인 당위에 다른 의견은 없다. 하지만 "무조건 한나라당을 막아야 한다"는 믿음 아래서 조급증이 넘쳐나는 것은 껄끄럽다. 더군다나 선거 승리라는 목적에 집착해, 정치공학적인 계산을 배제하고 연합하라는 주장 자체가 오히려 또 다른 정치공학을 불러오는 건 아닐까. '중도변혁' 노선이 지난날 비판적 지지로부터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 변혁에 대해 의심할 필요는 여전하다. 그래서 백낙청을 비롯한 창비 필자들의 동북아-한반도 거버넌스 주장이 비판적 지지의 대의에 휩쓸리는 듯해 안타깝다.

2. 대화) 20대 얘기, 들어는 봤어?-청년세대의 문화와 정치 : 창비 편집기자 정소영과 소설가 김사과, 논객 한윤형, 연세대 총학생회장 정다혜가 모였다. '20대가 하는 20대 이야기'라는 콘셉트에 어울리는 주제와 멤버들이었는데, 대담에서 88만원세대론 등으로 20대를 규정짓는 데 대한 반감이 드러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록 소설가, 논객, 학생회장이라는 '상징'을 통해 드러나지만,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의견들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청년세대의 문화와 정치'라는 소주제와는 조금 다르게, "20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고민이 더 도드라진 듯하다. 한편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대담자마다 결의 차이는 있어도 민주당 주도의 진보대연합에 대한 회의가 공통분모로 자리하고 있다. 이른바 진보언론조차 "대다수의 20대가 어떻게 무슨 고민을 하는지를 끌어내려는 노력이 없다"는 한윤형의 지적 또한 유효하다. 다만 그 일을 진보언론에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20대 스스로 뽑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천민자본주의의 이명박 시대에 아직 '더 많은 계몽'이 필요하듯, '청년'의 역할(변화를 요구하고 강제할 잠재력) 역시 요구된다는 점에서 어떻게 '청년' 스스로의 목소리를 담아낼 것이냐는 화두가 조금씩 열매를 맺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3. 문학평론) 가능한 불가능-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 얼마 전에 포스팅했지만(leopord, <끝나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 신형철의 글은 독자 내면의 아픈 지점을 짚어내면서 문학이 현실정치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파헤친다. 신형철은 진은영과 신해욱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해 '정치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의 연결(혹은 일치)을 설명하는데, 특히 진은영에 대해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첨예하게 미학적이고 싶다는, 결코 흔치 않은 이중의 욕망만이 저런 고백을 하게 한다"고 지적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지난 겨울호에서 언뜻 살폈듯이(leopord, <창작과비평 2009 겨울호>) 진은영과 백낙청 모두 '정치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 사이의 연결을 랑시에르를 경유해 설명하는데, 그보다 창비 겨울호에 게재되었고 본문에도 인용된 진은영 시를 다시 한 번 적어넣는 것이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고 첨예하게 미학적인 시란 무엇인가를 떠올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대
살인자는 아홉개의 산을 넘고 아홉개의 강을 건너
달아났지 살인자는 달아나며
원한도 떨어뜨리고
사연도 떨어뜨렸지
아홉개의 달이 뜰 때마다 쫓던 이들은
푸른 허리를 구부려 그가 떨어뜨린 조각들을 주웠다지

조각들을 모아
새하얀 달에 비추면
빨간 양귀비꽃밭 가운데 주저앉을 듯
모두 쏟아지는 향기에 취해

그만 살인자를 잊고서
집으로 돌아갔대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용감한 병정들로 살인의 장소를 지키게 하지 않았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아홉개의 산, 들, 강을 지나
달아났다
흰 밥알처럼 흩어지며 달아났다

그건 정말 오래된 이야기
달빛 아래 가슴처럼 부풀어오르며 이어지는 환한 언덕 위로
     나라도,
              법도, 무너진 집들도 씌어진 적 없었던 옛적에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고 치열하게 미학적인 시에 대한 고민은 당연히 현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6.9 작가선언」안에서 진은영과 신해욱 두 사람의 선언은 곧 시다. "없는 문이라면 그려서라도 열어젖혀야겠습니다"라는 신해욱의 선언이 시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가능한 불가능'인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의 몸이 시공간과 감정의 흐름 모두에 활짝 열려있을 때 가장 정치적이며 미학적인 시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4. 소설 장편연재1) 꽃 같은 시절 : 공선옥의 소설은 처음 읽는다. 재개발 지역에서 쫓겨나 전전긍긍하던 가난한 부부가 한 시골마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투쟁과 맞딱들인다는 이야기. 어디에도 낙원은 없고, 투쟁은 일상적이라는 것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새로울 건 없다. 그러나 '제1부 저승길을 못 가고'에서 정말로 저승길을 못가는 '오지랖 넓은' 할머니 영혼이 낡은 집에 남아 몸을 들썩일 때의 해학과 쓸쓸함이 이야기의 경계를 환상으로 이끌어 극적 부담을 줄여준다. 마을 노인들의 손에 이끌려 공단 앞에서 시위하다가 어느 새 대책위원장까지 되어버린 영희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는 문단이 포근하다. 새삼 떠올린다. 문학의 힘은 다름아닌 위로에 있다는 것을.

서러움 때문에 방문을 닫고 바람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자니, 속이 상할 때면 늘 그렇듯이 눈물이 나온다. 눈물이 나니 더 속이 상해와서 그만 뚝, 하는 식으로 헛기침을 하고 있는데, 천장에서 거미가 줄을 타고 주르르 내려오다가 영희 눈앞에서 똑, 하고 멈추었다. (...) 그러고 있자니, 또 뒤안 쪽으로 열어놓은 뙤창으로 웨애앵, 하고서 벌 한 마리가 방 안에 날아드는 게 아닌가. 벌은 마치 원무를 추듯 방안을 한번 비잉빙 돌다가 방바닥에 내려앉아, 머리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거미를 바라보고 참새 소리를 듣고 벌 춤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물이 시나브로 말랐다. 영희는 말개진 눈을 들어 방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어둑시근한 방안에 말할 수 없는 평화의 기운이 가득 서린 것 같았다. 영희는 문득,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거미가, 참새가, 벌이 그 위로의 말을 소리로, 몸짓으로 대신해주는 것만 같았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등을 다독이는 것만 같았다. 대롱대롱대롱, 뽀시락뽀시락뽀시락, 곤지곤지곤지……하면서. (pp.182-183)

5. 제8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소설)-딱 : 전삼혜의 <딱>은 정말 '딱' 대학문학상에 맞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갓 스무 살이 된 소년-몸은 스무 살이지만 그들은 종종 '소년'이다-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가 지은 도서관에서 친구와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한 이 소설은 세련됨보다 서투름이, 차분함보다 발랄함이 더 도드라진다. 다만 화자를 스무 살 남자로 잡은 게 오히려 감정을 이입하기 어려웠는데, '이 나이대의 소년'이라는 어떤 캐릭터는 상상하고 있지만, 그 캐릭터가 이야기 안에서 온전히 살아있다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평면적이다. 차라리 동년배의 여자아이로 이야기를 꾸며갔다면 어땠을까, 한편 B가 '나'에 대해 품는 감정선을 좀 더 풍부하게 살렸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 아버지를 코앞에서 맞딱들일 때의 당혹감과 불편함이 생략된 채, 너무 쉽게 '파본 수집 도서관'이라는 설정 속으로 숨어든 건 아니었나 싶다. 그럼에도 <딱>에는 '날것'의 냄새가 난다. 그 비릿한 냄새가 노릇하게 익어갈 때를 다시 한 번 기다린다.

6. 부러 미뤘던 건 아니었지만, 마지막 렛츠리뷰를 쓰는 손놀림이 그닥 가볍지 않다. 어떤 비장함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약간의 부담감과 아쉬움 때문이다. 건네받은 마지막 책이 내가 원했던 대로 창비라는 것이 새삼 고맙다. 다시 한 번 렛츠리뷰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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