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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츠리뷰] 창작과비평 2009 겨울호

by parallax view 2010. 1. 6.
0. 언뜻 이야기한 바 있지만(leopord, <091223>) 나는 비평이란 작업이 문학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는 물론 담론사나 메타비평에 무지한 나로선 <창작과비평>(2009년 겨울호, 이하 '창비')을 읽는 작업이란 무척이나 낯선 경험이다. 물론 창비에 문학비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잠시 읽기를 중단한 <전지구적 변환>을 통해 거버넌스governance와 한국사회 변혁에 대한 창비의 기획을 언뜻 읽어들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개념과 관념의 벽 앞에서 몇 번이고 숨을 고르며 오르내려야 했다. 나는 여전히 문학을 모른다.

1. 특집 우리 시대 문학/담론이 묻는 것 (1) : 백낙청과 함돈균, 백지연과 황정아의 비평이 함께 품고 있는 바는 문학의 정치성과 경계에 대한 긴장으로 보인다. 즉, 문학이 정치를 포함해 세계의 어떠한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야 한다는 자율성 문제를 건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평자들의 문제의식과 결의 차이를 이야기해야 오해가 없을 것이다.

먼저 백낙청의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은 시인 진은영의 평론 <감각적인 것의 분배 -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다.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의 '감성' 혹은 '감각적인 것'과 '미학적-감성적 체제'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지금/여기' 한국의) 시에 대한 진은영과 백낙청의 담론을 쫓아가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진은영의 문제제기가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랑씨에르의 '감성적 예술체제'에서 강조되는 '감각적인 것의 자율성'이 모더니즘 이론가들이 곧잘 내세우는 '예술의 자율성'과 다르다는 사실을 그가 분명히 인식하기 때문이다. "랑씨에르의 관점에 따르면, 어떤 작품이 전통과 결별하여 모험적인 실험을 시도해다는 사실만으로 새로운 감성적 분배에 참여했다고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미학적-감성적 체제에서는 시도되는 모든 새로운 실험들이 감성적 특이성을 지닌 것이 아니다. 예술의 정치적 잠재성은 (…) 예술의 자율성이 아니라 감성적 경험의 자율성에 의해 규정된다."(77면) 그리하여 "삶과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84면)는, 감당하기 결코 수월치 않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pp.16-17)

요컨대 시가 시 자체만으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당위나 '순수'(의 지향)는 시를 새롭게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여기서 "예술의 정치적 잠재성이 예술의 자율성이 아니라 감성적 경험의 자율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진은영의 주장은 이른바 '참여시'와 시인의 현실참여 사이의 갈등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멀게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나 80년대 박노해, 김지하의 시에서 가깝게는 노무현 추모제 때 안도현의 시에 이르기까지, 시가 사회에 개입하는 방식과 사회가 시에 개입하는 형태에 대한 논란은 여전할 듯 싶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혐오가 지배적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정치성을 이야기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게다. 백낙청은 이런 예시를 깊이 이야기하는 대신, 이장욱의 평론과 진은영, 김욱의 시 등을 통해 언어를 실험하고 시의 정치성을 탐색하는 젊은 작가들을 '선승(禪僧)' 혹은 '특공대'로 부르며 보다 대중적인 교감이 가능하길 희구하는 걸로 글을 맺는다.

2. 특집 우리 시대 문학/담론이 묻는 것 (2) : 뒤이은 함돈균의 <잉여와 초과로 도래하는 시들>은 더 나아가 시의 정치성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특히 2009년 용산이라는 거대한 참사를 말로 풀어낸 이영광의 시 <유령 3>과 이장욱의 시 등을 예로 들면서 "그러므로 회귀하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은, 죽음을 요구하는 법과 공권력에 맞서 결사적으로 농성중이고 투신중인 것은, '사람'이 되지 못해 죽고 만, 아니 죽지 못한, 이 사람들만이 아니다. (…) 억압된 것들이 회귀하는 시간은 그렇게 정치적이고, 이 순간, 시의 도래는 불가피하다"(p.45)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동원하는 잉여, 초과 개념은 바디우Alain Badiou의 라캉 읽기-라캉주의가 모든 욕망과 그 상징까지 설명할 수 있다는 이택광의 환원주의적 입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라캉과 라캉주의를 '사이비 과학'으로까지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에서 가져온 것으로, 함돈균은 시인이 윤리의 넘침과 정치의 초과를 모색함으로써 '이미 본 것을 재현하는 자가 아니라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예감하는 자'의 정체성을 다잡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 싶다.

백지연의 <타자의 인식과 공공성의 성찰>은 전성태의 소설집 <늑대>와 공선옥의 최근 소설들을 통해 '타자'와 '경계'가 한국 문학의 주요 화두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함돈균도 잠깐 아렌트Hannah Arendt를 언급하긴 했지만, 백지연은 특히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와 그녀가 읽은 아렌트를 바탕으로 경계 밖으로 벗어난 사람들(타자)이 소외되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읽어들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타자를 지켜보는 자신 또한 타자라는 역설이다. <늑대>에서 몽골에 사는 탈북자의 불안과 주인공의 불안이 겹치는 이유는 탈북자가 '경계인'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한국을 벗어나서도 분단체제에 얽매여있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자기를 넘는 연대, 자기를 넘는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국경을 넘었다 해도 과연 마음으로도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인가."(p.65) 그녀는 '다문화사회'라는 말이 자칫 타자 간의 갈등을 감추고 겉으로만 봉합하는 수준이 될 위험이 있는 한국에서 타자에 대한 인식이 공공성으로 연결되는 데에 문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낙관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황정아의 <이방인, 법, 보편주의에 관한 물음>은 백지연의 '경계'에 대한 문제의식과 연결되는데, 사도 바울의 '법' 해석에 대한 바디우와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비평을 해석하고, 그들의 '보편주의/메시아주의와 법' 해석을 바탕으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나타나는 이방인 문제에 접근한다. 사실상 서동욱의 <무엇이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인가 - 지난호 황정아의 비판에 대한 반론>에 답하는 이 글은 정치에 대한 담론이 결국 윤리 문제로 연결된다는 것을, 그리고 법이 상징하는 보편주의와 합리성이 샤일록이라는 (비록 사악하고 교활하지만 또한 유럽 기독교 세계 안의 영원한 타자인) 이방인을 사이에 두고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논단과 현장 : 김석철의 <4대강, 길이 있다>는 창비에 문학비평만 있는 게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 같다. 일찍이 1969년 한강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건축가 김석철은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4대강 개발에 반하는 대항논리가 단순한 반대로 그치는 게 아니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어야함을 역설한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섬진강이 지리적·경제적으로 각기 다른 특징을 갖는 만큼 그 접근도 달라야 하며 지역에 기반한 경제와 생활권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계획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지 않은가 싶다. 그럼에도 하나하나 계획을 제시해보는 상상력과 대안제시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사카모토 요시카즈의 <21세기에 '동아시아 공동체'가 갖는 의미>와 기미야 다다시의 <분단체제론과 한일 시민사회>는 창비의 거버넌스 논의와 백낙청의 '중도 변혁' 주장에 대한 긍정인 동시에 비판적인 논의다.

4. 문학 : 김연수의 <바다 쪽으로 세 걸음>은 장편연재물이고, 단행본이 나온다면 한 번 사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그의 이야기 방식이 좋다. 제12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인 이반장의 <화가전>은 여전히 박민규의 이야기, 특히 허구와 현실이 언어를 매개로 변신을 거듭하는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같은 이야기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제9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자 주하림의 <레드 아이>는 마음에 난 생채기를 기어이 헤집어 언어로 끌어내는 작업이 내게 여전히 난해한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위험한 고백>이 더 좋았다.

5. 창비가 그렇게 쉬운 평론지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엘리트주의를 비판하지만 정작 자기들이야말로 엘리트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게 아니냐고 비난할 수도 없다. 랑시에르와 바디우, 아감벤에 주디스 버틀러와 아렌트, 샹탈 무페가 계속 동원되는 것은 외국 이론을 통한 한국 작품 해석이 현실과 문학 사이의 관계맺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주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지식인의 식민주의 비판이라는 맥락이 가동한다는 걸 전제로 한다면.). 다만 시는 독자에게 정감의 유도와 교감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이론적 해석작업이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모호해진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 같다. 예컨대 정감영의 <이시영의 시와 활력의 정치학>은 스피노자의 정동affectus 개념을 통해 이시영 시에서 활력의 정치학이 가동하는 지점을 짚어내고 있는데, 평자의 주관적 감상과 별개로 정동 개념이 이시영 시에 특수한 것인지, 혹은 일종의 보편적인 방법론으로 기능하는지 모호한 것 같다(후자의 경우에는 환원주의라는 함정도 있다.). 한편, 창비와 백낙청의 주된 관점인 '중도'에도 온전히 공감하기는 힘들다. 아직 감상 수준이지만 백낙청의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읽을 때에야 비로소 비판과 대안의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6. 이번 겨울호는 2009년의 문학담론을 정리하는 동시에, 신인작가들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반장이 82년생이고, 주하림이 86년생,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자 문진영(<담배 한 개비의 시간>)이 87년생이라는 사실은 이제 80년대생 작가군이 어느 정도 가시화되었다는 징후로 읽어도 좋을 듯 하다(여기서 소위 순문학-장르문학 사이의 긴장관계도 고려해야 할 게다.). 20대 중후반대의 작가들이 늘어간다는 게 새삼 반갑다. 오는 창비 2010년 봄호에는 '제8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이 실릴텐데, 문창과 출신을 포함한 젊은 작가들의 출현이 이른바 순문학이니 장르문학이니 가리지 말고 우리 문학계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언어로 '여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우리와' 공감할 수 있는 작가들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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