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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umfabrik

<박쥐> : 욕망과 절망 사이의 여백이 공허한 이유

by parallax view 2009. 5. 1.

이미 개봉도 된 마당에 기고문이라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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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이 돌아왔다. 그의 귀환은 여지없이 강렬했다. 시사회장은 이미 기자들로 꽉 들어차서, 늦게 온 기자들은 애꿎은 홍보사 직원에게 불평을 늘어놓아야만 시사회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 끼었다. 이미 영화는 5분전에 시작되었다. 느지막이 들어선 덕분에 계단에 걸터앉아야 했다. 하지만 박찬욱 영화다. 서서라도 봐야했다.

독실하고 유쾌한 신부 상현(송강호)은 병든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일념으로 죽을 각오로 생체실험에 자원한다. 그는 몸에 바이러스를 심은 뒤 죽음을 기다리다 결국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기적이 발생한다. 그의 부활을 성자의 재림으로 숭배하는 신도들을 뿌리치고 다시 성모병원으로 돌아간 상현. 그는 어렸을 때 친구 강우(신하균)와 재회한다. 강우 어머니인 나여사(김해숙)가 상현을 몹시 반기는 와중에, 상현의 시선은 병약한 남편과 지독한 시어머니 사이에서 갈등하는 강우의 아내 태주(김옥빈)에게 향한다. 그리고 상현은 자신이 피를 빨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강렬한 욕망 또한 깨닫는다. 상현의 욕망과 태주의 욕망이 정면충돌한다. 치정극이 시작되었다. 


<박쥐>(2009)는 박찬욱 감독의 해묵은 프로젝트였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뜻하지 않은 흥행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차기작으로 <박쥐>를 시작하려 했지만 연이은 기획-복수 3연작-으로 미뤄지다 이제야 그 결실을 맺은 셈이다. 비록 뱀파이어 영화라지만 그 내막은 치정살인극이다. 흡혈이 상징하는 에로틱한 욕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싶어 하는 감독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여러 가지 점에서 <박쥐>와 비교될만한 영화는 작년에 개봉되어 마니아들의 호평을 얻은 스웨덴 영화 <렛미인>(2008)이 아닐까 싶다. <렛미인>이 눈의 나라 스웨덴과 뱀파이어의 언밸런스한 앙상블을 배경으로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박쥐>에서 박찬욱은 은유를 다루는 기술을 마음껏 과시한다. 마작모임 중 남몰래 섹스를 하려다 실패한 상현과 태주가 마작패를 만지작거리며 마작과 섹스 사이의 은유로 야한 농을 푸는 게 그렇고, 영화 후반부 상현과 태주 사이의 뱀파이어 이야기를 통해 연인들이 흔히들 보여주는 긴장과 갈등을 적절하게 드러내는 배치가 또 그렇다.

여전히 연예뉴스를 후끈 달구는 송강호 성기노출씬이나 김옥빈 가슴노출씬은, 관객마다 체감하는 정도는 다르겠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본다면 생각보다 강렬하지 못한 편이다. 특히, 자신을 신성시하는 열성신도들의 희망을 없애버리기 위해 일부러 강간을 연기하는 모습은 송강호 본인이 말했던 순교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엔 2% 부족했다. 타락한 신부의 위악적인 악행으로 보이기엔 임팩트가 모자라다.


오히려 눈길을 끄는 건 나여사의 집이다. 이야기의 주 무대가 되는 나여사의 집은 상현이 태주에게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줄께요” 라는 말과 정확히 모순된다. 상현의 개입으로 나여사의 집은 그 자체로 지옥이 되기 때문이다(역설적이게도 나여사의 집은 하얗게 도배되고 집안엔 불빛이 가득해진다.). <올드보이>(2003)와 <친절한 금자씨>(2005)가 세트디자인을 통해 개인과 사회 사이의 단절, 그 와중에 왜곡되어가는 욕망을 다룬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안타깝게도 <박쥐>는 관객의 기대에 온전히 부응하기엔 힘들 것 같다. 특히나 ‘박찬욱’이라는 브랜드를 생산한 <올드보이>의 후광이 여전히 강한 탓일 게다. 개그는 자연스럽게 농익었다. 플롯은 다소 빤하지만, 욕망과 절망, 희망을 적절하게 엮어내기에 이전 작품에 비해 덜 불편하다. 죄의식과 구원 사이의 공백이 공포를 자아낸다는 점도 체크포인트다. 신하균의 능글맞은 연기가 송강호와 김옥빈 사이, 김옥빈과 김해숙 사이, 김해숙과 송강호 사이의 공백을 메우듯이.

그럼에도 <박쥐>에는 내재적인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로도, 풍부한 은유와 개그로도, 욕망을 절망과 희망 사이의 순환 고리로 설명하려는 노력으로도 메울 수 없는 여백이 있다. 요컨대 카타르시스가 없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죄와 벌, 우연과 필연 사이의 극단적인 갈등이 <박쥐>에서는 힘을 잃는다. ‘박찬욱’이라는 작가역량이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위안인 동시에 불안이 된다. 우리는 또다시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김주원(PD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