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수상해도 영화 한 편 볼 여유는 있더라. 극장에 아직 걸려있는 <렛 미 인> 포스터를 보는 순간에 지인과 나는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영화는 깊고 어둡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이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나무로 시작되듯이, <렛 미 인>은 어둠 위로 흐르는 눈발을 통해 흑과 백의 선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반라의 소년이 창문을 통해 마주보는 스톡홀름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한 모녀가 이사를 오면서 시작되는 살인은 소년이 매일 당하는 이지메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이다.
<렛 미 인>의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은 원래 코미디 전문 감독이란다. 뱀파이어에 대해서라고는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한다는 정도 밖에는 몰랐다. 원작소설을 쓴 작가에게 전화로 "마늘은 어때요?"라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그러나 <렛 미 인>은 뱀파이어의 공식을 절묘하게 비튼 호러영화다. 낮이 극히 짧고 밤이 긴 스웨덴의 환경은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를 연상시키지만, 영화는 뱀파이어의 존재론에 큰 무게를 둔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뱀파이어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 분)와 공명하는 소년 오스칼(카레 헤데브란트 분)이다.
나약하고 내성적인 소년의 성장기는 수많은 이야기의 원질신화다. <렛 미 인>도 그 신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소년의 결핍에 주목한다. 여기서 부모의 이혼이나 아버지의 동성애 정체성 등은 아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나 심경변화의 신호에 불과하다. 이런 소년상에 흔히 결핍되어 있는 것은 용기, 무엇보다 자아 정체성이다. 이엘리가 주목하는 지점도 이것이다. 그녀는 영원히 12살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복수심과 용기 사이의 괴리로 인해 살인을 몽상할 뿐인 오스칼에게 이엘리가 던지는 일갈은 오히려 현실적이다. 영화속 뱀파이어는 현대인의 틈바구니 속에서 숨쉬고 걷는다. 그래서 영화의 판타지는 강한 리얼리티를 띈다.
영화의 리얼리티는 소리로 투사된다. 침 삼키는 소리, 이엘리가 목을 물어뜯는 소리, 오스칼이 물속에 처박혀 있을 때의 침묵까지, 영화는 소리를 극도로 살려 환상을 현실속에 스며들게 한다. 거기다가 호러영화의 전매특허 같은 깜놀음향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도 깊고 진중한 사운드로 장면을 끌어간다.
제목이 나타내듯,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다. 이 장르공식은 이엘리와 오스칼 사이의 감정과 겹쳐 플라토닉한 서정을 자아낸다. 사진처럼 온 몸으로 피를 쏟아내는 소녀는 소년에게 말한다. "단 한번만이라도 내가 되어봐." 이엘리의 아버지인 줄 알았던 호칸(페르 라그나르 분)은 사실 오스칼의 미래다. 이제는 너무 늙어 사람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그 역시 오스칼처럼 이엘리에게 빠졌으리라. 영화는 그 무엇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잘 짜여진 구도와 안정적인 사운드가 침묵과 겹쳐 관객의 상상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미덕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지인과 대화하던 중, 그녀는 이 영화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호러영화인 줄 몰랐다고 했다. 동상이몽을 깨치고 짓는 웃음이 헛헛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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