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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1990)

by parallax view 2008. 5. 22.

(사진 : 예스24)

1. 소설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물이나 개념의 정의를 내리고자 할 때엔 사전을 뒤져보면 된다. 하지만 '~란 무엇인가' 등등의 문제가 제기하는 것이 그 사물(개념)의 사전적 의미를 묻는 일은 없다. 더 정확하게는 "(당신은)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란 질문에 더 가깝다.

이런 유의 질문에 공통된 대답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작가들만 봐도 그렇다. 작가가 쓴 소설은, 소설 일반에 대한 작가의 정의에 다름 아니다. 박민규에게 소설이란 매직서커스유랑단에서 광대가 벌이는 자학개그이고(그래서 그의 소설은 낄낄거리며 웃지만 가슴엔 어쩐지 싸한 게 남는다), 얼마전 작고하신 박경리 선생에겐 삶과 자연의 무한함에 대한 찬양일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겐 어떤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했을까. 정이현은? 보르헤스는? 마광수는?

'존재'는 항상 사전적 정의 그 너머에 있다. 문학은 x와 y를 더해서 z를 도출해내는 공식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의 세계는 분명 무리수의 세계지만, 우리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종종 '구별'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유리수와 정수 등으로 세분화시키곤 한다. 보통 우리가 어떤 소설은 '순문학'이라고 부르고, 어떤 소설은 '장르문학'이라고 나누는 기준은 주로 그 소설에서 사용되고 있는 주 소재(SF, 추리/미스터리, 판타지, 무협)로 갈라진다.

그렇다면 '대중문학'이라는 구별은 어떨까. '문학이나 기타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고, 높은 지적 소양을 갖추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문학' 정도의 사전적 정의는 가능하다. 그렇다면, 과연 '장르문학'이 '대중문학'의 자리를 꿰어찰 수 있느냐면 그건 어려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판타지물을 즐겨보는 것 같지만, 대부분은 '양판소'로 불려지는 대여점/만화방용 소설이고 가독성 외에는 아무 장점이 없으며 주 연령층도 서른을 넘기지 못한다(물론 예외도 있지만...-_-;;).

묘하게도 순문학 소설보다는 장르문학 소설이 더 '대중적'일 텐데도, 어째서 장르문학은 여전히 대중적이기보다는 소수 팬층이나 연령층에 국한되어 있을까. 이게 한국만의 특징인 걸까. 적어도 위의 질문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대중소설이란 무엇인가"로 말이다.


2. 대중소설이란 무엇인가.

스페인의 대중작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1990)은 "대중소설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다. 15세기 후반 플랑드르(오늘날의 벨기에 지방. '플란다스의 개'의 바로 그 플란다스이기도 하다)에서 그려진, 귀족들이 체스게임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둘러싼 살인과 음모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이 말만 들어도 어떤 장르인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맞다,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의 구성을 모방하지만 군데군데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과 상상을 삽입함으로써 작품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준다. 그리고 체스게임을 툭툭 던지면서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끔 유도한다. 추리라는 장르는 두뇌를 자극해야만 한다는, 어떤 강박관념마저 느껴지는 구성을 사용하고 있달까. 대신 추리소설의 미학이랄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몰입도와 냉철한 반전 같은 것도 떨어지고 그 빈 자리를 체스게임과 역사고증으로 메우려는 듯한 인상도 풍긴다. 하지만 '대중'을 대상으로 친절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려는 노력은 엿보인다.

역사, 미스테리, 추리, 두뇌게임 - 이런 장치들 때문에 이 소설을 유럽출판계에서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비교할만 하다 싶다. 이쯤 되면 또 생각나는 소설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함으로써 영화화까지 된(그러나 영화화는 최악의 실수였음이 드러난-_-;;) '다빈치 코드'.

이런 소설들이 공유하는 소재들은 유럽과 영미권에서는 그닥 새로운 것들은 아닌 듯 하다. 한국에서도 이순신이나 정조를 소재로 한 소설들 많지 않은가. '장미의 이름'처럼 학구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소설까지는 아니더라도(사실은 만들지 못했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_-;;).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은 '다빈치 코드'보다는 '장미의 이름'에 좀 더 가깝다. 학구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댄 브라운류의 소설이 보여주는, 진중한 척 하는 경박함과 뻔한 반전과는 거리가 멀다. 문장이 주는 무게감이 확실히 다르다. 좀 더 깊은 맛이 난다. 하지만 묘사나 지식의 전달에 너무 많은 문장을 할애한 나머지, 이야기의 흐름이 늘어지고 간혹 맥이 빠지는 것은 치명적이다. 마치 쵸코렛 맛이 지나치게 풍부한 스펀지 케이크를 먹는 기분이랄까.

문장의 깊이, 역사에 대한 상세한 고증, 독자의 참여를 요구하는 적극성 - 이런 점에서 보면 '다빈치 코드'보다 훨씬 나은데도, '대중소설'의 자리에 서기에는 어딘가 어렵다. 스페인과 한국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이 점이 못내 아쉽다. 학구적이면서도 보다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이야기가 나오기란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3. 보다 대중적으로

솔직히 '다빈치 코드'의 성공은 나에게 있어 귀여니류 소설의 유행만큼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지금은 귀여니에 대해 포기해탈했다-_-;;). 물론 움베르토 에코나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이야기가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건 인정한다. 특히 레베르테가 '검의 대가'(1988)에서도 저지른 똑같은 실수-결정적으로, 초반부가 너무 지루하다!-는 대중문학을 지향하면서도 그 언저리에 닿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빚어낸다.

문학은 대중과 친해야 한다. 독자는 이야기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만, 그러나 문학적 깊이와 가독성 사이에서 적당히 균형을 취할 필요는 있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은 균형잡기에 실패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둘러대더라도, 어쩐지 아쉽다. 추리소설의 강점을 살리면서 역사를 깊이있게 파고드는 문장력이 요구된다.

그의 다음 작품 '뒤마클럽'(1993)은 좀 기대해도 될까.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자니 뎁(본문 소개서에 그렇게 써있다-_-;;;) 주연의 영화 '나인스게이트'(1999)의 원작이라는데. 아, 그러고 보니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도 1994년에 케이트 베킨세일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는데, 과연 얼마나 재미가 있을지...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나의 점수 : ★★

현학적인 추리소설. 그러나 대중소설의 틈바구니 속에서 표류한, 아쉬운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