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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레닌을 회상하며

by parallax view 2023. 8. 15.

나데주다 꼰스딴찌노브나 끄룹스까야(크룹스카야)의 <레닌을 회상하며>(최호정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1) 읽기를 마쳤다. ‘레닌을 추억하며’가 좀 더 제목으로 적절할 듯한 이 회고록은 크룹스카야가 레닌을 만나 평생의 반려이자 혁명 동지로서 살아온 삶을 기억에 의존해 쓴 것이다. 책은 원래 그녀가 레닌을 처음 만난 1893년부터 1907년까지를 다룬 제1부와 1908년부터 1917년까지를 다룬 제2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1918년부터 1919년까지를 다룬 제3부를 1933년부터 1938년에 걸쳐 덧붙임으로써 현재의 판본으로 출간되었다. 제1부가 제정 러시아의 억압적인 환경과 1905년 혁명을, 제2부가 1905년 혁명의 실패와 제1차 세계대전,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1917년 2월 혁명부터 10월 혁명 직전까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면, 제3부는 10월 혁명과 러시아 내전, 그중에서도 제헌의회의 해산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볼셰비키 중앙의 모스크바 이동과 전시공산주의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

 

이후에 덧붙은 제3부에는 1920년대의 볼셰비키 내 분파투쟁과 우크라이나 대기근(1932~33년) 그리고 대숙청(1937~1938년)이 배음으로 깔려 있음을 갈수록 짙어지는 스탈린주의적 서술에서 짐작할 수 있다(틈날 때마다 트로츠키를 비난하고, 독일의 사민주의자들이 자본가계급을 도와 나치를 용인했다고 힐난하며, 내전기의 레닌이 노농동맹을 강조하는 대목을 상기시킴으로써 대기근의 충격을 완화하려는 듯한 서술이 그렇다). 크룹스카야 본인이 고참 볼셰비키이자 ‘레닌주의자’라는 점에서, 이 책은 지은이의 내외적 타협과 편집부의 윤색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여기서 ‘레닌주의자’라는 표현은 내전기 레닌의 관점에 충실하려는 입장과 레닌 사후 스탈린을 중심으로 하는 볼셰비키의 자기규정을 함께 아우른다). 그렇지만 레닌과 망명 생활을 함께하며 온갖 고난을 견뎌내고 동료들의 고통을 직시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특히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세심하게 보여주는 대목을 읽고 있으면 온갖 스탈린주의적 서술은 전적으로 윤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이 책에서 크룹스카야가 기억하는 레닌은 원칙을 고수하며 투쟁에 나서는 혁명가이자 숲과 산을 사랑하는 산책자이고, 논적을 신랄하게 조롱하지만 대중 앞에서는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지극히 내향적이고 소박한 남자다. “날마다 그를 살펴보았다면 (…) 생각에 잠긴 그를 건드리면 한순간 그의 눈에 모종의 슬픔이 감도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9쪽)” 같은 사람이다. 한편 1917년 혁명과 내전 시기는 정말로 총체적인 대혼돈이었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혁명의 전망을 고수했던 유일한 집단이었을 볼셰비키가 레닌 사후 이념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갈수록 경직되어갈 만한 상황이었다는 것(그것을 정당화하는 것과 별개로) 또한 이 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레닌을 회상하며>는 스탈린주의 문건인 동시에 당대인의 혁명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명암이 분명하다.

 

“아홉 해의 두 번째 해외 체류 기간 동안[1908~1917년] 일리치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열심히, 조직적으로 일했고, 사소한 일들도 하나하나 면밀히 들여다보았으며, 모든 것을 하나의 고리로 묶었고, 아무리 쓰디쓴 진실이라도 전과 마찬가지로 직시할 줄 알았다.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갖은 압제와 착취를 증오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 노동자의 대의에 충실했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가슴으로 이해했으며 그 대의에 자신의 모든 생활을 바쳤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며, 그는 달리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과 마찬가지로 열정적이고 격렬하게 기회주의와 싸웠으며, 서둘러 퇴각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대하여 싸웠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그는 가까운 친구들이 운동을 퇴보시키는 것을 보면 그들과 절연했고, 대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어제의 적에게 동지를 대하듯 진솔하게 다가설 줄 알았으며, 전에도 그랬듯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곤 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연을, 우거진 봄의 숲을, 산속 오솔길과 호수를, 대도시의 소음과 노동자 대중을 사랑했으며, 동지들과 운동을 사랑했고, 온갖 다면성을 띤 투쟁과 삶을 사랑했다. 일리치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지만, 날마다 그를 살펴보았다면 그가 더 말을 삼가고 사람들을 더 주의 깊게 대하고 생각에 잠겨 걷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을, 생각에 잠긴 그를 건드리면 한순간 그의 눈에 모종의 슬픔이 감도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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