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 돌피언과 이리스 반 데어 튠의 <신유물론: 인터뷰와 지도제작>(박준영 옮김, 교유서가, 2021)을 읽었다. 저자들은 로지 브라이도티, 마누엘 데란다, 캐런 버라드, 퀑탱 메이야수를 신유물론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설정하고, 신유물론 개념의 교집합으로 '횡단성'과 '수행성'을 지목한다. 그들이 신유물론에 관심을 갖고 이를 지지하는 까닭은 페미니즘이 처한 이론적 곤경, 즉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사회구성주의 사이의 진동을 신유물론으로 돌파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들은 이분법을 근대의 상징으로 간주하며 격렬하게 비난하고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대체하기 위해 '횡단'(들뢰즈·가타리)과 '간행'(버라드)을 거듭 강조한다. 이들의 이론적 태도는 신유물론으로 묶이는 이론적 담론이 (분과학문으로서) 철학이라기보다 (학제간연구로서) 문화연구의 연장선에 놓이며, 그 자체로 문화이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저자들은 물질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재현을 거듭 부정하면서 (양자역학을 문화이론으로 치환하는) 버라드를 따라 '윤리-존재-인식론'의 담론적 헤게모니를 주장한다.
저자들과 그들이 분석하는 이론가 다수가 이분법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메이야수는 여기서 제외하는 게 맞을 듯하다.) 이들이 의식하지 않은 채 겨냥하는 맞수는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횡단성은 변증법의 나선형 전진(즉 역사의 진보)을 대체하기 위해, 수행성은 담론적 실천과 물질적 실천을 매개 없이 결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책 마지막 장의 제목 '남(여)성의 종말'은 신유물론에서 도출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을 요약한다. (지배-피지배 관계를 함축하는) 범주 자체의 소멸, 개체화된 다수의 수평적인 연결, 흐름으로서의 대중(자율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용어로는 다중), 반재현주의로서의 반대의주의. 저자들은 아나키즘 운동과 정체성 정치를 하나로 만듦으로써 정당 없는 사회운동을 옹호하는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유물론 입문>의 저자가 신유물론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퀑탱 메이야수 대신 제인 베넷을 배치한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메이야수는 (비록 하먼과 갈라서기는 했지만) 물질의 선차성과 우발성의 필연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관계로부터 물러나는 입장을 고수한다. 흐름이나 간행, 횡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보다 생기론이 신유물론에 더 잘 부합한다.
주석이 지나치게 상세한 것 같아 처음엔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읽다 보니 반대 의견도 충실하게 소개하려는 성실함이 돋보였다. (옮긴이가 들뢰즈·가타리와 차이점보다 친연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 해러웨이가 들뢰즈·가타리의 동물 논의에 몹시 불쾌해했다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해러웨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렇게 유목을 강조하면서 정착생활과 반려종을 힐난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동물에 조금도 관심이 없으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갖다 쓴 것에 불과하다고 항의한다. 해러웨이와 들뢰즈·가타리 사이의 거리는 옮긴이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멀어 보인다.
'Read & Thin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닌을 회상하며 (0) | 2023.08.15 |
---|---|
냉전의 지구사 (0) | 2023.05.02 |
문헌학, 극소 (0) | 2022.11.20 |
독서 불가능성의 알레고리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유명론으로서의 해체주의〉 읽기 (2) | 2022.09.06 |
기본소득, 공상 혹은 환상 (0) | 2022.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