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22년 6월 24일~8월 12일 진행된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 문제로서의 자본주의”(맑스코뮤날레 2022년 여름 세미나)에서 읽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프레드릭 제임슨,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의 발제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 본문의 (숫자)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의 쪽수이며, 볼드체는 원문에 따랐다. (AR)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에서 《독서의 알레고리》의 원제(Allegories of Reading)를 줄인 것으로, AR 뒤에 붙은 숫자는 원서의 쪽수다.
7장 이론_포스트모던 이론적 담론에서 내재성과 유명론
2절 유명론으로서의 해체주의(412~480쪽)
들어가며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1절 ‘내재성과 신역사주의’에 이어 2절 ‘유명론으로서의 해체주의’를 통해 ‘포스트모던 이론적 담론’의 경향을 ‘내재성immanence’과 ‘유명론nominalism’으로 요약한다. 그는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를 대표하는 저작으로 문학비평가 폴 드 만Paul de Man의 《독서의 알레고리》1)를 분석함으로써 ‘유명론으로서의 해체주의’라는 테제를 펼쳐 보인다.
‘후기구조주의’라는 라벨이 대표하는 포스트모던 담론은 대문자 역사를 거부하고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제임슨은 후기구조주의가 “모든 사유의 필연적 비일관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설명이라면, 그것이 통시적인 것을 비판하는 집요함으로 인해, 그리고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성을 자신의 공격 목표의 중심에 두는 메커니즘을 통해, ‘역사’를 사유하려는 시도가 (비록 혼란스럽고 내적으로 모순된 방식이지만) 마침내 사유 자체의 소명과 동일시되고 만다(413)”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후기구조주의로 분류되는 담론이 역사를 문제시할수록, 통시적 사유는 사유의 중심에서 물러나기는커녕 담론을 끌어들이는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인데,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통해 (알튀세르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라는 문제설정’을 도입했기 때문이다.2) 드 만은 《독서의 알레고리》의 〈제2부 루소〉를 통해 루소의 저작 여러 개를 공들여 분석했다.3) 제임슨은 “현대인 중에 드 만만큼 강렬하게 역사의 위기와 역사기술의 위기 그리고 통시적 서사 언어의 위기를 경험한 사람은 드물다(417)”면서 루소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독서의 알레고리》를 포스트모던 담론의 성격을 포착할 열쇠(이자 자물쇠)로 삼는다.
드 만이 루소를 집중적으로 살핀 것은 드 만에게 있어 “18세기의 역사적 특수성을 확보하는 일(418)”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낭만주의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준비하기 위해 루소를 읽다가 독해/독서reading의 문제로 옮겨간 드 만은 “역사적 관점으로부터 자신의 ‘해결책’을 교묘하게 분리하려는 시도(417)”를 한다. 하지만 드 만에게도 시대구분 범주는 미약하게 남아 있는데, 바로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사이의 구분이 그렇다. 낭만주의 또는 18세기는 “(드 만의 핵심적인 윤리적 범주로 표현하자면) 미혹seductiveness의 시기(418)”이자 “역사성과 역사의식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역사기술의 (아직 관행까지는 아니지만) 가능성이 탄생한 시기(419)”다. 18세기는 이성이 “모든 사실을 제쳐두고 순수한 추상적 연역이나 환원을 통해 역사를 일으켜 세우려(419)” 애쓰는 시기, “‘기원’ 개념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거의 동시에 그에 대한 무지막지한 비판을 수행한다는 역설적 상황(420)”에 놓인 시기로서 독자를 미혹한다.4)
등가성으로서의 메타포
루소는 “근본적으로 변증법적인 텍스트인(420)”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유에서의 환원’과 최소한 ‘자연상태’라는 부정적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사실을 제쳐두는 방식(420)”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루소는 ‘사실에 근거한 역사’가 아니라 언어를 비롯해 모든 현실적인 것을 소거한 뒤 남는 가상의 모델을 자연상태로 규정했다는 것이다.5) 하지만 루소를 읽는 일에는 “이런저런 다양한 실존주의적 정신분석학을 통해 접근하고 싶은 유혹(424)”이 찾아온다. 루소는 “동일한 텍스트 안에서 구조를 만들자마자 해체(424)”하기 때문이다. 다만 “루소의 특권화된 인식론적 가능성에 대한 심화된 ‘설명’(424)”을 차단하는 드 만에게 “핵심적인 주제는 루소의 정신이 이른바 자연상태를 구축했던 방식(424)”이다.
여기서 제임슨은 해체주의라는 라벨로 묶이는 드 만과 데리다를 분리해야 한다는 작업가설을 제안한다. 데리다에게는 “말과 글을 ‘소유한’ 자는 그것이 부재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427)”는 점에도 불구하고, 과거가 현재와 다르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드 만은 자연상태를 ‘허구’라고 규정(AR 163)(425)”한다. 다시 말해 드 만에게 자연상태는 ‘메타포metaphor’다. 메타포는 드 만이 펼치는 이론의 출발선으로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메타포가 축자적 의미와 지시적 기능으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 아니라 “텍스트의 내적 사건과 외적 사건, 축자적 형식의 언어와 비유적 형식의 언어가 구별될 수 있는 세계, 축자적 측면과 비유적 측면이 각각 하나의 속성으로 분리되어 교환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세계를 상정(AR 152)(428)”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류이지만 피할 수 없는 오류다.6)
드 만에게 메타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환영’으로서 언어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드 만의 메타포 이론을 전경화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이름과 메타포 사이의 긴장 관계, 혹은 원한다면 이름에서 메타포로의 전형적인 미끄러짐으로 무대화(429)”된다. 거칠게 말해 드 만은 루소의 출발선인 이름에서 메타포로 문제설정을 이행한다. ‘나무’라는 이름은 도로변에 붙잡혀 있는 구체적인 식물과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언어의 미끄러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조건으로서 “언어는 등장하기 마련이다(430)”. 인간과 사물의 접촉이 관계에 대한 인식을 낳고, 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비교가 나타나며, 비교에서 수數가 나타남으로써 ‘개념화’와 ‘추상화’가 시작된다. 여기서 메타포는 추상화와 동일시된다.
이 지점에서 제임슨은 드 만과 마르크스를 비교하며 추상화와 등가성을 연결한다. 그는 《사회계약론》을 앞에 두고 국민공회가 성립되는 과정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진다 운운하며 ‘마르크스주의적인 질문’을 던지는 체한다. 그러다 제임슨은 드 만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영민하고 가치 있는 경고성 제안(434)”을 한다며, “이런 관념이나 ‘가치’의 언어 조직을 통한 분류 작업(434)”이 바로 그러하다고 주장한다.7) 제임슨이 보기에 드 만의 메타포는 마르크스의 가치형태 분석을 통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 1장 3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에서 서로 다른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이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총체적인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일반적 가치형태’-‘화폐형태’를 거치며 총체적인 등가교환을 완성하는 과정을 분석했다.8) 제임슨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가치형태 분석은 레토릭을 통한 드 만의 설명과 완전히 양립한다. 다만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의 나무가 전혀 다른 나무와 병치되고, 그 결과 나무라는 ‘이름’과 ‘개념’이 발생하게 되는지 이해하는(437)” 게 아니라, “(소금, 망치, 리넨, 코트 같이) 뚜렷이 구분되는 사물들이 어떻게 등가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437)”다. 제임슨은 복잡한 형식에 대한 직관(마르크스의 가치형태 분석)을 통해 단순한 형식(드 만의 메타포 분석)을 파악해야 한다면서도, “철학적·언어적 추상화는 그 자체로 교환의 효과이자 그 부산물(438)”이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9)
비록 드 만의 메타포가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아도르노의 동일성/개념이) 마르크스의 가치와 병치되지만, 제임슨은 가치에 드 만과 아도르노에게 결여되어 있는 강점이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오류’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드 만과 아도르노가 은연중에 진실(진리)-오류라는 축에 이끌리는 데 반해, 마르크스는 본질-현상이라는 축을 통해 오류 개념의 오류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다. 제임슨은 드 만이 오류라는 철학적 문제를 미처 떨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드 만의 개념적 장치인 ‘레토릭(수사학)rhetoric’에 매개적 기능이 있다고 말하면서(드 만에게 레토릭/수사학은 독해/독서와 교환할 수 있는 용어다), 메타포 개념을 보다 폭넓게 사용하면 “메타포는 우리가 약호전환이라 부르는 것의 핵심적 장소(445)”가 된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메타포는 서로 다른 약호나 이론적 담론 들이 전적으로 무관하거나 연결될 수 없는 방식으로 광범위한 현상들을 ‘동일하다’고 선언할 수 있는 전의의 역동성이 작동하는 장소이다(여기에서 우리가 사용해왔던 말은 추상화이다)(445)”.
메타포-레토릭-알레고리
제임슨은 존 L. 오스틴과 드 만을 비교하면서 오스틴의 ‘수행성’이 수행한 역할을 드 만의 레토릭이 수행한다고 해석한다. 수행성은 “언어철학 안에 있는 일종의 새로운 ‘타자’로서 새로운 언어학적 용어 내부에 [언어 밖의] 행위를 위한 자리를 확보하여, 언어학적 용어가 이제는 다른 ‘모든 것’에 확장되는 것을 정당화했다(446).” 마찬가지로 등가성으로서의 메타포는 드 만의 독해 속에서 텍스트 일반에 확장되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언어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기 위한 드 만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언어(또는 약호)의 선차성은 보장될 수 없다. 다만 드 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담론 자체의 발생(448)”이며, 이때 발생되는 담론은 (루소는 물론 드 만 자신에게도) “되풀이 혹은 반복(450)”되는 것이다.
제임슨에 따르면 (18세기 자체를 특권화하는) 드 만이 루소에게 주목한 것은 루소가 “다양한 장르와 담론 형식의 글을 실제로 썼을 뿐만 아니라 (…) 스스로 일종의 독학자로서 무無에서 그 모든 것을 재창안했다고 느꼈던 것으로(449)”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손수 쓴 비범한 글들은 우리가 장르의 기원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는(449)”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드 만은 루소를 읽기 위해 심리학적·정신분석학적 경향으로 향하면서 “느낌, 정서, 본능, 충동 등과 같은 실존적인 것을 텍스트의 ‘효과’로 변형(450)”시킨다. 거칠게 말해 드 만은 루소의 다양한 텍스트를 자체의 작동원리에 따라 반복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자동인형’으로 읽어내며, 독자가 텍스트를 통해 얻는 느낌은 저자가 발명한 기계장치의 효과라는 것이다.10)
그러나 이는 “매 장마다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말과 완전히 같진 않다(451)”. 제임슨에 따르면 드 만이 루소의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장마다 말하려는 바는 “최초의 메타포적 딜레마로부터 알레고리가 탄생한다는 것(451)”이다. 그런데 난점은 메타포의 결과가 “알레고리로서 명시되기보다는 오히려 좀 더 일반적으로 내러티브로서 지칭된다는 것이다(451)”. 여기서 해체적 내러티브는 두 순간으로 분리된다. 해체적 내러티브의 첫 번째 순간에서는 메타포적 언어가 자신을 축자적 언어로 공포한다. “메타포에 의해서 생성된 개념은 즉시 자신의 기원을 은폐하고 스스로를 진리 혹은 지시적인 것으로서 무대화한다(451).” 그리고 해체적 내러티브의 두 번째 순간에서는 “보다 복잡한 변증법의 수준에서 첫 번째 순간을 자신의 내부로 흡수(452)”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메타포가 자신을 축자적인 것으로 선언하는 순간, 메타포는 확실성을 의심받으며 텍스트는 와해된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에서는 “언어 일반과 언어적 과정, 혹은 드 만이 독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보다 뿌리 깊은 회의(452~453)”가 나타난다. “여기서 알레고리 이론은 완결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개별 텍스트로 다시 돌려보낸다(454).” 우리는 자동인형 같은 루소 텍스트로 진입할 때마다 드 만이 제안하는 의미의 ‘독해’를 반복한다(여기서 ‘독해/독서’는 ‘독해/독서 불가능성’을 가리키며, ‘독해/독서 불가능성’은 ‘해체’와 교환될 수 있는 메타포다). 그런데 제임슨에 따르면 그때마다 우리는 “각각의 구체적인 텍스트의 독특한 구조적 실패에 주의를(454)” 기울일 수 있으며 “여기에 생산적인 혼란이 있다(454)”.
제임슨이 말하는 ‘생산적인 혼란’은 드 만의 다음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사회계약론》은 정치적 입법의 필요성과 그러한 입법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원리의 완성을 끊임없이 옹호하는 한, 그 자체가 파괴하는 권위의 원리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가 특징적으로 우리가 독서 불가능성의 알레고리라고 부른 것에 나타난다는 점을 알고 있다. (…) 《사회계약론》은 실제로 그것이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을 계속 수행하는 일종의 아포리아와 같이 구축되어 있는 만큼 여기에 해당된다.”11) 《사회계약론》이 수행할 수 없음을 보였지만 계속 수행하는 것은 정치체의 토대를 구축하는 ‘약속(사회계약)’이다. 제임슨은 이와 같은 “불가능한 ‘해결책’(455)”이 ‘변증법적 내러티브’에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변증법적 내러티브란 반성적 메커니즘을 통해 스스로를 쉴 새 없이 보다 고차원적인 복잡성으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그 과정 중에 있는 모든 항과 출발점을 변형시키는 것이며, 또한 (드 만 스스로 지적하듯이) 앞선 것들을 지양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포괄하는 것이다(455~456).” 흥미로운 것은 드 만에게 ‘의식’ 또는 ‘자의식(자기의식)’이 “‘억압된 것의 귀환’인 양 유령처럼 끈질기게 남아 있다(457)”는 지적이다. ‘주체의 사라짐’이라는 포스트모던 또는 ‘포스트컨템퍼러리한’ 이론의 슬로건이 무색하게, 드 만에게는 모던한 개념인 자의식(반성하는 의식 또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의식하는 메타의식)이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임슨은 놀랍게도 드 만의 메타포 이론이 사실 이데올로기 이론(적어도 이데올로기 이론과 친연성이 있는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해체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분석과 멀든 가깝든 관계가 있으며, 이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계와 유사하다(459).” 드 만이 “이데올로기적 재현으로부터 쉽게 영향을 받은 것은, 언어 자체의 작동이나 체계적인 오작동에 대해 그가 철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과 상관관계가 있다(458)”. 그런 점에서 “드 만은 18세기 기계적 유물론자에 가깝다(459)”. 세계를 거대한 자동인형으로 치환하는 기계적 유물론자라는 이 메타포는, 드 만이 루소의 〈사부아 사제의 신앙고백〉을 독해하면서 “‘신’과 그에 동반한 개념성(460)”을 “언어 자체의 기능과 인식론적인 것으로서의 ‘판단 행위’를 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의 문제로 이관(460)”하는 데서 도출된다. 다시 말해 드 만의 ‘유물론’은 문제를 치환하거나 재배치하기 위한 메타포적 행위(또는 언어적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제임슨은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칸트의 누메논noumenon 또는 물자체thing-in-itself라는 또 다른 우회로를 통해 드 만의 유물론에 접근한다. 물자체는 “일종의 텅 빈 개념으로, 그 어떤 경험의 형식과도 조응하지 않는다(462)”. 칸트는 인간이 저 괴물 같은 물자체, 바로 “사유 불가능한 비인간의 세계와 공존하며 그것과 불가능한 방식으로 중첩되어 있다고 상정(464)”한다. 반면 인간 정신의 범주 너머에 언어의 기능과 전의trope가 있다고 이해하는 “드 만은 언어학적 ‘범주’를 통해 칸트의 인식론적 범주를 대체하고 칸트식의 윤리적 타협을 효과적으로 배제하는 동시에, 차가운 회의주의를 통해 루소의 ‘유신론적’ 해결책으로 나아가는 문을 폐쇄해버린다(464)”.
유명론과 아이러니
이로써 제임슨은 그 위에 ‘유명론으로서의 해체주의’라고 쓰인 방의 문을 활짝 연다. “드 만은 분명 허무주의자가 아닌 유명론자nominalist이다(465).”12) 제임슨이 1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보다 더욱 오래된 중세의 유명론을 끄집어낸 것은, 드 만의 작업이 “유명론에 대한 특정 경험이 언어 생산이라는 특수한 영역 안에서 무시무시하고 철두철미한 순수성과 함께 절대화되고 이론화되는 장소(466)”이기 때문이다. ‘보편/범주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유명론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한 이론적 담론의 토대이자 배경이다. 독해/독서 불가능성의 알레고리 즉 해체적 알레고리는 무한한 해체의 과정이며, 결코 끝나지 않을 무한회귀의 순간이다.13) 아이러니는 얼핏 고답적으로 보이는(또는 ‘모더니즘적인’) 드 만이 오히려 ‘새로운’ 포스트모던 문화의 조건과 맞닿는다는 데 있다. “드 만의 해체주의는 미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듯한 순간에 미학을 되살리기 위한 최후의 구제 작업이며, 심지어 문학 연구를 수호하고 그 가치를 확장시키며 특히 문학 언어에 특권을 부여하는 행위(467)”인데, 어떻게 포스트모던 문화와 맞닿을 수 있다는 것일까.
제임슨은 드 만이 텍스트를 ““스스로를 해체하는” 글에만 제한적으로 적용(467)”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텍스트 자체가 “‘문학적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정의(468)”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금욕askesis’이라는 메타포가 도입된다. 18세기 텍스트의 미혹(또는 낭만주의 텍스트의 유혹)에서 출발한 드 만의 독해는 ‘릴케의 미혹’을 거치며 모더니즘적인 금욕을 지향한다.14) 릴케에게 단 하나의 감각 통로인 유포니euphony는 목소리를 통해서만 시어를 노래하는 금욕적 제스처다. 금욕은 “모더니즘 시대의 사물화와 감각의 분열, 그에 따른 각 감각의 자율화라는 역사적 현상을 깊숙이 가로지르며, 모더니즘 회화에서 새롭고 비범한 강렬함을(471)” 얻는다. 제임슨에 따르면 “쾌락과 욕망 그리고 감각에 대한 중독을 금욕적으로 거부(473)”하는 드 만은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로 축소된) 가상Schein 또는 미학적 현상의 지위를 이중화한다. “먼저 가상과 감각적 현상에는 미학 이데올로기와 오류 혹은 잘못된 신념 같은 부정적 지위를 부여하는 반면, 예술 자체(혹은 최소한 문학)는 특권적 영역으로 남겨둔다. 즉 예술은 언어가 스스로를 해체함으로써 가장 최근 판본의 ‘진리’가 여전히 유용할 수도 있는 특권적 영역이 되는 것이다(473).”
그런 점에서 드 만의 쾌락 없는 미학(또는 “청교도주의(474)”)은 “1980년대의 ‘신도덕’이라 추정되는 것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1960년대의 주요한 ‘성과’이자 전쟁터 중의 하나였던 몸과 욕망과 감각의 해방을 향한 정교한 찬사에 대해 1980년대가 내린 파산 선고에 대한 예언일 것이다(474)”.15) 제임슨은 텍스트주의자인 드 만의 미학을 이제 “불완전하게 청산된 모더니즘이라는 스펙터클을 통해서 읽어야만 한다(474)”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입장과 주장은 ‘포스트모던’적이지만, 그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474).” “그렇다면 왜 완전히 포스트모던적인 결과를 끌어내지 못했는가가 우리의 마지막 질문이 되는데(474)”, 이에 대해 제임슨은 “우리가 설명해야 할 것은 드 만에게 나타나는 모더니즘의 불완전한 청산보다는, 무엇보다도 모더니즘을 청산하려는 기획 그 자체(475)”라고 말한다. 이제 드 만의 미학에 자리한 아이러니는 텍스트 외부의 아이러니와 만난다. 바로 나치즘 전력이다.
제임슨은 드 만의 청산되지 못한 모더니즘을 ‘과거청산’ 문제와 연결하며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 제2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했을 때 드 만이 신문기자로서 썼던 기사들은 부역 혐의의 증거가 되어 드 만 사후에 스캔들로 비화했다. 대표적으로 유대인을 섬으로 보내버리자는 기사는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지나고 보니 분명 불길하다(764 미주 32)”. 당시에는 “인습적인 본격 모더니즘적 탐미주의자 내지는 비정치적 탐미주의자의 상당히 평범한 표본(476)”으로 보였던 드 만은 얼핏 마르틴 하이데거와 비슷한 위치에 놓인 듯하다. 하지만 제임슨은 (하이데거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그의 “정치적 헌신을 위한 노력에 대해 어떤 은밀한 존경심을 지니고(477)” 있다고 말할 정도로) 나치즘에 대한 하이데거의 진심과 드 만의 ‘부역’을 동일선 위에 놓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드 만의 해체주의가 부역의 기억을 중화하거나 ‘해체’하기 위한 시도라는 식의 접근은 우스꽝스럽다.
그보다 제임슨은 “악명 높았던 ‘반유대주의’ 기사(478)”가 “자신의 안녕을 생각하기엔 너무도 똑똑했던 한 젊은이의 저항을 위한 기발한 노력(478)”이었다고 선해한다. 드 만의 기사는 사실 이랬다는 것이다. ‘유대인 문학’이 위험하다고 비난하는 너희 반유대주의자들아, 너희가 유대인 문학을 비난할수록 너희 아리안의 문학이 취약하다는 걸 반증할 뿐이니 너희 것을 잘 만들어가는 데나 힘을 써라. 제임슨은 드 만이 구사한 아이러니가 지독하게 오독되고 있는 아이러니를 목도한다. 아이러니는 드 만의 해체주의적 독해가 “이런 재앙을 ‘무효화함’으로써 최소한 이런 종류의 기초적인 해석적 실수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독자들을 양성하려는 의도(479)”에서 수행되었지만, “그의 제자 대부분은 그 ‘텍스트’를 마주하자마자 그런 실수를 했던 것 같다(479)”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드 만의 교육론에서 “정치와 역사는 처음부터 괄호에 묶여버렸기 때문(479)”에 드 만의 학생들은 이런 텍스트에 대처하는 데 무능력했다.16)
그리고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궁극의 아이러니는 드 만의 성숙한 저작 속에서도 대문자 아이러니Irony가 살아남았다는 데에 있다(479)”. “그의 저작에서는 모더니즘의 레퍼토리가 완벽하게 와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는 지고의 이론적 개념으로서, 전통적 모더니즘의 가치로서, 자의식과 반영성 개념의 중심으로서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실제로 아이러니는 《독서의 알레고리》 마지막 페이지에서 모더니즘의 최고봉으로서 조용히 다시 부상하고 있다(479~480).”17)
나가며
메타포에서 출발해 아이러니로 끝나는 드 만의 여정은 이처럼 수 겹의 아이러니와 마주한다. 제임슨은 ‘스스로 허구임을 인식하는 텍스트’로서18) 문학을 특권화하는 드 만을 일종의 이데올로기 이론가로 읽어낸다. 이때 이데올로기 이론은 이데올로기 비판인 동시에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다. 다만 드 만은 자신이 수행하는 작업이 이데올로기 비판인지도, 그 작업이 자체로 이데올로기인지도 모를 뿐이다. 이처럼 제임슨은 메타포를 ‘약호전환transcoding’으로, 알레고리를 내러티브로, 해체적 알레고리를 변증법적 내러티브로 약호전환함으로써 드 만의 메타포 이론을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약호전환한다.
그렇지만 반反인간주의와 탈脫학제를 공유하는 드 만의 메타포 이론과 (알튀세르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제임슨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지향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앞서 제임슨이 언급했던 이슬람교와 기독교라는 메타포는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암시한다). 드 만에게 아이러니Irony가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면, 제임슨에게는 역설Paradox이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거칠게 말해 아이러니가 진실(진리)-오류의 축에서 도출된다면, 역설은 본질-현상의 축에서 출현한다고 할 수 있다(역설은 ‘두제곱하는 사유’로서 변증법의 중핵에 놓여 있다).19) 제임슨은 이와 같은 독해를 통해 드 만의 메타포 이론을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약호전환하기 위해서는 비평critique이라는 매개가 필요하며(또는 비평 자체가 약호전환 과정이며), 우리 역시 이 둘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동시에 매개하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우리 시대의 이론적 담론이 있으며, 이들과 어떻게 대면하느냐가 비평의 주된 과제일 것이다.20) 그렇다면 제임슨의 특장점은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가 처한 난관을,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적 텍스트’가 아니라 얼핏 반동적으로 보이는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돌파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지칭하는 강령 또는 프로그램이 바로 텍스트라는 공간에서 ‘모든 것을 역사화하는’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미학the aesthetics of cognitive mapping일 것이다.
1) 폴 드 만, 《독서의 알레고리》, 이창남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
2) “그러므로 루소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범주하에서 역사를 사고하고 역사적 과정을 자연이 부정되는 적대적 발전의 과정으로 사고한 최초의 이론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이 알튀세르, 《루소 강의》, 황재민 옮김, 그린비, 2020, 134쪽.
3) 드 만은 루소의 주요 저작에 주제어를 할당하고 그 주제어의 지배 아래에서 해석을 수행한다. 《독서의 알레고리》 제2부는 메타포-《인간 불평등 기원론》, 자아-《피그말리온》, 알레고리-《쥘리 또는 신엘로이즈》, 독서의 알레고리-《에밀》 중 〈사부아 사제의 신앙고백〉, 약속-《사회계약론》, 변명-《고백》 순으로 구성되었다.
4) 이 부분은 전적으로 루소에게 할당된 대목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계몽주의 안의 반反계몽주의자로서, 홉스와 로크의 자연상태를 경험적 현실의 단순한 환원일 뿐이라고 규탄하고 ‘순수자연상태’를 제시한 자연권 철학자로서 루소를 다루는 알튀세르를 참조할 수 있다. 루이 알튀세르, 앞의 책; 루이 알튀세르,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9.
5) “그러니 모든 사실들을 배제하는 것으로 시작해보도록 하자. 그것들은 이 문제와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본 주제에 대해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연구들을 역사적인 진리로 간주해서는 안 되고 그저 가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론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이충훈 옮김, 도서출판 b, 2020, 44쪽.
6) 제임슨은 《단일한 근대성》 중 드 만을 다루는 〈이행양식들〉에서 오류에 대한 변증법적인 접근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은 변증법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변증법은 사유의 시간성을 단언하면서도 곧이어 진리를 위해서는 그에 앞서 오류, 망상, 외양(그리고 ‘첫 번째’ 읽기)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 현재의 존재론에 관한 에세이》, 황정아 옮김, 창비, 2020, 130쪽.
7) 드 만은 《독서의 알레고리》에서 루소의 텍스트에 대해서도 자신의 등가적 관점(또는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제국주의(449)”)을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유형을 독서 불가능성의 알레고리 혹은 간단히 알레고리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신앙 고백〉은 《쥘리》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알레고리라는 사실과 수사학 모델에 기초한 장르 이론의 관점에서 그 두 텍스트 사이에 어떤 구분도 이루어질 수 없음이 명확해져야만 한다. 수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 하나가 개념에 대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폴 드 만, 앞의 책, 335~336쪽.
8) 카를 마르크스, 《자본 Ⅰ-1》,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103~132쪽.
9) 이와 더불어 제임슨은 드 만이 《사회계약론》을 분석할 때 “(국가라는 일자, 인민이라는 다자 같은) 수 체계의 메타포적 구조(AR 256)(442)”를 좀 더 밀어붙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이에 대해 미리 나온 응답이 1985년에 출간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일 것이다. ‘등가물의 연쇄’에 따른 헤게모니 전략(또는 정체성 정치)의 정체는 ‘가치법칙’에서 떨어져 나간 유명론이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에 비춰볼 때, 헤게모니 개념은 접합 범주가 지배하는 이론적 영역을 가정하며, 따라서 접합된 요소들은 따로따로 확인[식별]될identified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어쨌든 접합이라는 것이 주어진 관계적 복잡성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실천이라면, 이는 그와 같은 실천을 통해 접합되거나 재구성되는 요소들이 따로따로 현존하는 형태를 띠고 있어야 함을 함의한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2, 172쪽, 강조는 본문.
10) 그런 점에서 ‘문법의 수사화rhetoricization of grammar’와 ‘수사의 문법화grammarization of rhetoric’는 텍스트를 일종의 자동인형으로 읽어내는 프로그램programme(포스트모던 문학비평의 강령인 동시에 그 자체로 메타포로서 프로그래밍)이라고 할 수 있다. 드 만은 〈제1장. 기호학과 수사학〉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메타포와 같이 대체에 기반을 둔 계열적 구조에서 메토니미와 같이 우연적인 연상에 기반을 둔 구문적인 구조로 이행함으로써 문법 형식의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측면이 얼핏 보기에는 한 주체의 자기 의지에 따른 자율적인 창의성을 드러내는 듯한 대목에도 작동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여러 형상은 아주 독특한 개인적 재능의 산물이나 발명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누구도 정해진 문법 유형에 대해서는 자신의 기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구절에 대한 우리의 독서는, 통합적인 메타포의 힘에 대해 그러한 기여를 주장하는 바로 그 시점에, 그러한 이미지는 사실상 반쯤 자동적인 문법 유형들의 은밀한 사용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폴 드 만, 앞의 책, 32쪽.
11) 폴 드 만, 앞의 책, 372쪽.
12) “유명론은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철학적 경향이자 역사적 사건이다. 미학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에 대한 거부인데, 그 예로서 예술을 장르나 양식으로 객관화하는 헤겔적 방법에 대한 거부를 들 수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 《후기 마르크스주의》, 김유동 옮김, 한길사, 2000, 317쪽, 강조는 본문. 유명론적인 예술이 곧 모더니즘적인 예술이라고 해석하는 제임슨은, 유명론이 미학에서 ‘새로움’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혀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학에 부여한 시간성은 의미심장하게도 (만화가 유추인 것과 마찬가지로) 심미적 모나드의 역사적 역동성과 유사하다. 전자의 패러독스는 후자의 패러독스를 비추어주는데, 특히 새로움이나 ‘새것’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에서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미학에서의 새로움은 자신의 전사前史를 무효화하고 자신의 혁신을 낳은 바로 그 테크닉을 구식이 된 진부한 테크놀로지로 전환시켜버리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같은 책, 325쪽. 이 서술은 해체적 내러티브의 두 순간과 호응한다.
13) “수사학을 더 의식하여 《비극의 탄생》을 독서하면, 그 텍스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권위적인 주장이 그 텍스트 자체에 의해 제공되는 진술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폴 드 만, 앞의 책, 164쪽. 정전canon의 비일관성과 이율배반을 폭로함으로써 텍스트texts 또는 해석의 생산성을 증폭하는 해체주의의 전략은 동시대의 상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14) 여기서 제임슨은 《독서의 알레고리》의 편집 순서를 거슬러 독해한다. 《독서의 알레고리》는 릴케, 프루스트, 니체, 루소 순서로 편집되어 있다. 그러나 원서의 부제가 ‘루소, 니체, 릴케, 프루스트의 형상 언어Figural Language in Rousseau, Nietzsche, Rilke and Proust’임을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접근법은 아닐 것이다.
15) 《독서의 알레고리》 영문 초판은 1979년에 출간되었다.
16) 스캔들의 가장 가까운 사례로 아비탈 로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데리다의 제자이며 역시 문학비평가인 그녀에 대한 ‘폭로’와 피해자의 법적 대응, 그녀를 옹호하기 위해 동료들이 연서명한 문서의 폭로가 이어지면서 내내 혼란스러웠다. 로넬의 스캔들과 관련해서는 Masha Gessen, “An N.Y.U. Sexual-Harassment Case Has Spurred a Necessary Conversation About #MeToo”, New Yorker, August 25, 2018 참고. 한편 로넬의 작업에서 아이러니의 위치를 탐색하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넬은 《어리석음》 중 〈3. 시험의 수사학〉에서 드 만을 다루며, 이 장은 “1. 접속: 어리석음, 아이러니, 기계성,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다. 아비탈 로넬, 《어리석음》, 강우성 옮김, 문학동네, 2015, 157~256쪽.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독해가 필요하다.
17) “아이러니는 더 이상 어떤 비유가 아니고, 모든 비유적 인식의 해체적 알레고리를 무화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체계적으로 이해를 무화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아이러니는 비유적 체계의 완결과는 전혀 무관하게, 오히려 비유적 착란의 반복을 강화한다.” 폴 드 만, 앞의 책, 405쪽.
18) 해당 부분은 예일대학교 영문학과 폴 프라이 교수의 2009년 봄학기 문학이론입문Introduction to Theory of Literature 강의를 참고했다. YaleCourses, 〈11. Deconstruction Ⅱ〉, 2009. 9. 2., https://youtu.be/51s-J_Jwr40 (2022년 9월 6일 접속)
19) 아이러니와 역설의 특징을 각각 보여주는 못된 농담이 있다. 하나는 〈바르샤바에 간 레닌〉이라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고(“레닌은 어디에 있소?” “레닌은 바르샤바에 있소.”), 또 하나는 ‘주성치 짤’이라 불리는 두 신scene의 편집된 이미지다(“못생겼잖아!” “다시 보니 선녀 같다.”). 전자는 부재(오류)를 통해 존재(진실/진리)를 드러내는 아이러니의 예시로, 후자는 첫인상(현상)에 대한 오해를 거쳐야만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는 역설의 예시로 볼 수 있다.
20) 그중에서도 들뢰즈의 세례를 받은 이론적 경향의 목록을 열거할 수 있다.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존재론, 신유물론, 행위자연결망이론, 정동이론 등의 동시대 ‘이론theories’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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