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소비가 대안일까?> (레디앙 기고)
나는 서울 북부, 대학들이 비교적 가까이 붙어 있는 지역에서 살고 있다. 대학가인 만큼, 주변 상권의 가격이라는 게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체감하는 바는 그렇다. 주로 치킨집, 피자집, 중국집처럼 대학생들이 먹기 좋은 음식을 파는 영세 자영업자들이다. 물론 거대 마트도 있긴 하다. 이마트는 ‘이마트 메트로’라는 형태로 조그맣게(?) 자리를 잡았을 뿐이고 그나마도 다른 중소기업형 마트들과 경쟁 중이다.
사람 잡는 치킨?
요즘 다시 알바를 시작해서 뉴스 하나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었다. 일이 끝나고 느지막하게 트위터에 접속해서야 자본가의 폭력 행위라든가 예산안 날치기 통과 등을 드문드문 읽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접한 뉴스는 롯데마트에서 팔고 있는 치킨 얘기였다.
900g에 5천원. 꿈같은 무게에 가격이다. 이런 무식한 가격이 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이들 지적했을 것이다. 원자재 가격을 줄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런 판매가를 책정할 수 있는 비결이 인건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경제신문들 따위가 시장은 원래 ‘자유경쟁시장’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우리네 재벌의 실상은 결국 독과점이고 가격 결정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이마트와 롯데마트가 각각 먹을거리를 가지고 경쟁을 하다 보면 이전부터 그 먹을거리를 판매하던 영세 상인이 받을 피해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배달 문제와 판매시간을 예로 들며 파괴력이 그다지 넓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강한 가격 경쟁력은 저 단점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거대 마트들의 먹을거리 경쟁이 반짝 상품에 그치지 않을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최철원 폭행사건과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대안’ 중 하나로 소비자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비윤리적인 인물과 기업을 대상으로 불매 운동을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이마트 피자와 롯데마트 치킨 때문에 가격 경쟁이 발생해 영세 자영업자의 피해가 발생한다 해도, 그걸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우리 동네 '해피네 슈퍼'
오래도록 회자되었던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의 트윗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님이 걱정하는 만큼 재래시장은 님을 걱정할까요?” 이 말은 시장경제 안에서 진리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겨냥한 말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는 ‘윤리적 소비’에 냉소를 날린 것이다.
이 ‘윤리적 소비’는 공격의 대상을 덜 명확히 하되, 착한 이미지로 보다 많은 지지자를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손쉽게 진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이를 ‘이념적 소비’로 공격한 정용진의 지적은 아주 틀리지 않다. 그가 생각하는 경제적 합리성에서 그렇다. 그에게 있어 가격을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소비는 비합리적이고 이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게 과연 그 혼자만의 생각이냐는 것이다.
나도 가급적 ‘윤리적 소비’를 하려고 한다. 십여 년 동안 동네를 누비고 다닌 암컷 개 ‘해피’가 쿨하고 시크하게 손님을 맞이하곤 하는 ‘해피네 슈퍼’에서 라면이며 주전부리할 것들을 산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나 자신을 위해 치킨 한 마리를 먹곤 하는데, 그 때에도 비록 프랜차이즈지만 비교적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동네 치킨집에서 산다. 피자도 오랫동안 작은 빵집을 운영하시다가 업종을 프랜차이즈 피자집으로 변경하신 분의 가게에서 사 먹는다.
하지만 이런 작은 소비가 모여서 자본주의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얼마나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과자나 라면 같은 경우, 마트에 가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얼마든지 더 싸게 살 수 있다. 그런데도 일부러 동네 슈퍼에 가서 사려다 보면 여전히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쌀이나 휴지 같은 것은 별 수 없이 마트에 가서 산다. 없는 살림에 많은 양의 물건을 싼 값에 살 수 있는 길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자본이라는 크레디트에 묶여 있는 한, 누구나 윤리적 소비든 이념적 소비든 가격 경쟁력 앞에서 종종 힘을 잃어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이게 나 자신만의 경험인 것일까.
나의 '윤리적 소비' 경험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롯데마트 치킨이 다른 프랜차이즈 치킨 브랜드로 하여금 가격 산정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경쟁을 활성화시킬 거라는 기대를 하기도 한다. 기업가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하는 말이다. 정용진의 말은 이런 시장적 사고방식 안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이다.
이걸 자본가 개인 혹은 특정 기업 하나에 대한 비판만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최철원 폭행사건도 같은 지점에 서 있다. 자본가 개인의 폭력을 단죄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여기서 무기력하게 자본 밖으로 도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하면서 끝낼 생각은 없다. 윤리적 소비는 딱히 보이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을 믿으면서 할 수밖에 없는 행위다. 나는 이 점을 되새겨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거대 자본에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말이다.
우리가 동네 상점과 맺는 인간적인 유대는 분명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소비자와 생산자 혹은 유통업자라는 경제적 관계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호혜하는 경제가 가능해야 한다. 당신은, 그리고 나는 동네 슈퍼와 치킨집, 피자집과 얼마나 서로 나누고 있는가?
내게도 호혜의 경험이 있다. 작년 겨울, 요새만큼 추웠던 어느 날 라면 한 팩을 사러 해피네 슈퍼에 들어섰을 때다. 가게 주인인 할머니가 한참 끓고 있던 냄비에서 무언가를 떠서 놋그릇에 담아주시는 것이다. 수제비였다. 매일 라면만 먹는 것 같아 안쓰럽다며. 노인들이 드시는 거라 간이 밋밋했지만,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집에 가져가 단숨에 먹었다.
호혜의 경험
그러고 나니 해피네 슈퍼가 자꾸 눈에 밟히곤 했다. 소비자와 유통업자라는 형식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영역이다. 흔히들 ‘미담’이나 ‘가난한 시절의 추억’ 쯤으로 여기곤 하는 경험도, 어떤 소비를 할 것이냐, 라는 문제, 더 나아가 어떤 삶을 살 것이냐 라는 문제로 들어가면 느낌이 달라진다.
이마트 피자와 롯데마트 치킨을 안 사먹는다고 해서 재래시장이 단숨에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통큰치킨’이라고 해서 통 크게 나쁜 치킨인 것도, 동네 치킨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치킨인 것도 아니다. 단지 ‘윤리적 소비’는 선언에 불과하며, 동네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
이른바 진보 언론에서조차 거대 자본의 횡포에만 눈길을 돌린 나머지, 소비라는 형태 너머에 존재하는 관계는 못 본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세 상인이 죽어간다는 말이 잠깐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소비-생산 관계 안에서 먹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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