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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Progress

[진보, 야!] 우리에게 '투표하라' 말하지 말라

by parallax view 2010. 8. 30.
"우리에게 '투표하라' 말하지 말라"
(레디앙 기고)

원제는 "규율도 훈계도 싫다 - 요구해야 할 것은 20대의 계급 투표다"였다. 투표 독려 트윗을 가지고 제재 따위 운운하는 선관위도 웃기지만, 젊은 사람들을 여전히 '선도'와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에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년'이란 시대를 불문하고 '자유'와 '방종'이라는 이중잣대의 대상이다. 종종 그렇듯 '어른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모습을 대상에 투사한다. 세대를 그만 논하자는 이 글이 끝내 세대론을 소환한다는 역설이 있다는 건 인정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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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2 지방선거는 많은 면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트위터를 통한 투표 독려는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보도되었다. 투표하고 인증샷을 남기면 그림이나 소설을 전해주겠다는 제안이 트위터에서 줄을 이었다. 제안을 한 사람들은 주로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 소설가, 연극인 등 이른바 ‘문화계 인사’였다. 유명 바둑 선수도 여기에 동참했다. 그들이 겨냥하는 대상은 바로 20대 유권자들이었다.

"포상은 못할망정 제재라니"

그런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지난 2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20대 투표 참여를 목적으로 한 트윗이 공직선거법 230조를 위반한다며, 투표를 독려한 사람들에게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당사자인 임옥상 화백과 소설가 박범신, 안도현 시인 등이 격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임옥상 화백은 <미디어오늘>과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누구를 찍으라는 말도 없었고, 20대가 투표율이 너무나 낮아 투표장에 가게끔 선배 또는 기성세대 입장에서 독려한 것인데 이게 무슨 정치적 행위인가”라며 “선관위가 할 것을 민간 차원에서 한 것이다. 오히려 포상의 대상에게 제재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미디어오늘, “선관위, ‘20대 투표’ 독려 임옥상 탁현민 등 행정조치”)

법을 기득권층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알아서 몸을 숙이는 거야 행정기관의 유행인지 오래다. 무엇보다 선관위야말로 투표 독려를 위해 문화상품권을 돌렸던 전례가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선관위의 행태가 부당한 거야 더 말할 것이 없다. 아직 선관위는 ‘법적 조치’의 범위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세게 밀어붙일수록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20대 투표를 독려한 분들에 대해서도 좀 할 말을 해야겠다. 한 마디로 그 분들의 말도 썩 마뜩찮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들의 투표 독려 행위엔 여전히 ‘철없는 20대’라는 이미지가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20대는 철도 없고 정치에도 무관심하고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을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자. 중앙선관위의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율 분석 결과 발표에 따르면 10, 20대 투표율은 확실히 상승했다.

젊은 층 투표,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거 아니다

연령대별 투표율을 보면 60세 이상 69.3%, 50대 64.1%, 40대 55.0%, 30대 후반(35~39세) 50.0%, 19세 47.4%, 20대 전반(20~24세) 45.8%, 30대 전반(30~34세) 41.9%, 20대 후반(25~29세) 37.1% 순으로 나타났다. 눈에 띄는 건 19세 투표율이다. 지난 2006년 지방선거 때(37.9%)보다 9.5% 포인트 증가했다. 19세 투표율은 30대 후반(50.0%) 다음으로 높다. 그리고 20대 전반이 그 뒤를 이었다.

이것을 두고 이른바 ‘촛불 세대’의 약진이라고 해석하는 건 지나칠 게다. 촛불이 타올랐다가 꺼진 지 불과 2년 밖에 안 됐다. 또, 트위터를 이용하는 계층은 스마트폰의 가격 하락과 트위터 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30대-IT-남성이라는 이용자층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선관위 자료만으로는 선거 독려 트윗이 10, 20대 투표율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실증할 수 없는 일이다.

즉, 10대와 20대 유권자들은 트위터의 선거 독려와 별개로 ‘알아서’ 투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촛불 때 무던히도 욕을 먹었던 그 20대는 다른 여느 연령대 유권자들과 마찬가지로 투표소를 찾았고,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 혹은 당에게 표를 던졌다.

물론 투표를 독려하는 심리는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친구, 지인들에게 “투표하자”고 문자를 돌렸다. 당명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해 투표를 호소했다. '이명박 정권 심판, 4대강 개발 심판'이라는 구호가 단순한 구호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없는 현실 탓이다. 나도 절박했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당 대표의 투표율이 너무나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모두 잘 알고 계신 바와 같다.

이런 위기들 때문에 더욱 더 10대도 20대도 투표장을 찾았던 게 아닌가. “젊은 것들은 개념 없고 발칙하다.”는 관념이 얼마나 나이가 많은 녀석인지를 떠올려 보자. 고대의 아테네부터 현대의 대한민국까지, 이 관념은 ‘어른들’의 머리에 달라붙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트위터의 투표 독려 이벤트에도 이런 관념이 깔려 있던 건 아닐까.

헛짓거리 촛불 논쟁

‘어른들’이 노파심 섞인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10대와 20대 유권자들은 투표를 한다. 비록 정치에 대한 환멸감이 우리들을 감싸 안고 있다 해도 말이다. 지난 촛불 논쟁을 잠깐 돌아보자. 20대를 허수아비 삼아 후려치면서 10대를 얼싸안고 “20대 말고 니들이 혁명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시도가 얼마나 헛짓거리였는지 떠올려 보자.

전부터 지적된 바이지만, 20대의 미성숙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노숙(老熟)이 문제다. 치열한 입시 경쟁에 이어 취업 경쟁에 매달려야 하는 10, 20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숙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한쪽에서는 철이 없다고 손가락질하고, 다른 쪽에서는 너무 일찍 세상에 물들었다고 손가락질한다. 트위터의 투표 참여 이벤트에는 기성세대의 이중 잣대가 펄떡펄떡 숨 쉬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이런 식의 논의도 너무 빤하다. 20대의 정치 참여 여부에서 요구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20대 시의원도, 20대 구청장도 아니다. 20대의 계급 투표다.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계급적 성향을 의식하고 있는 20대는 얼마나 있는가.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아닌 줄 점점 몸으로 느끼고 있지 않나.

위기의 징후는 도처에 있다. 이번 달에 5급 공무원 등의 30%를 전문가 채용 시험을 통해 선발하겠다는 발표가 있은 후로 행정고시를 준비해 온 사람들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을 터다. 또, 이 발표로 인한 후폭풍은 고시생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타격은 7급, 9급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에게로 전해 내려질 게 뻔하다. 이들의 다수는 누구인가? 바로 20대다.

신분상승의 진입장벽은 점점 높아만 가고, 사회경제적 안정성은 취약해지는 현실에서 20대의 생존 입지 또한 더욱 더 불안정해진다. 여기에는 당연히 비정규직과 최저임금 문제도 겹친다.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레디앙, “최저임금 시급 1만원, 이 정도는 요구하자”)이 설득력을 가질 법하다.

나이는 먹어도 20대 빈곤은 계속된다

이제 여기서 더 나아가 20대의 계급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즉, 더 이상 세대만을 가지고 공격하거나 방어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88만원 세대 담론이 유효했던 것은 지금 20대가 30대가 되고, 10대가 20대가 되더라도, 20대라는 ‘빈자리’의 빈곤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비관 때문 아니었나.

선거 독려 트윗에 대한 선관위의 반응과 그로 인한 논란이 해프닝으로 끝날지 어떨지는 불확실하다. 10대와 20대는 논쟁이야 어떻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럴 때일수록 세대론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청년층이 처한 계급적 한계를 지목하고 이를 돌파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이는 규율이나 훈계로는 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