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당장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레디앙 기고)
원래 부제는 '기본소득은 20대 빈곤화를 해소할 수 있을까?'였다. 그리고 본문 중간 "한국의 중산층은…'멋진 신세계'다."는 부분은 내가 아니라 한윤형의 것이다(한윤형, <도대체 어떻게 '진보'하란 말인가?>). 레디앙에서 출처를 생략해 다시 써넣는다. 이 글은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와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에 대한 후기를 겸한다(leopord,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참석하렵니다>,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
* 장석준(진보신당 상상연구소) 님에게 : 학술대회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비평에 머문 감이 있습니다. 기본소득에 대한 당내 토론과정을 생략했다는 점 인정합니다. 다만 학술대회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확고한(!) 입장들에 반해, 장석준 님의 태도가 무척 신중해 보였기에 그런 인상이 들었던 듯합니다. 말씀하신 '사회 서비스의 탈상품화'와 기본소득이 어떻게 엮일 수 있을지(공공보건의료, 공공임대주택 등) 풍부한 기획이 당내 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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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5일 기본소득연합 발족식이 열렸다. 장시정 서울 노원구 기초의원 예비후보를 비롯한 사회당 후보들에, 이윤상 충남 천안 기초의원 예비후보 등 진보신당 후보 두 명, 그리고 서울시장 출마로 논란 한가운데 있는 이상규 서울시장 예비후보 등 민주노동당 후보 세 명이 기본소득연합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지방선거 예비후보에 시민단체 활동가, 블로거까지 참여하는 기본소득연합에 이름을 올리는 대신, 발족식 며칠 전에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에 동참했다. 기본소득이 정책으로 구현될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그럼에도 선언은 필요하다. 왜 우리가 ‘보편적 복지’를 말해야 하는지, 왜 ‘사회주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을 하기 전에, 1월 27일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다. 학술대회라곤 해도 ‘어떠한 자산 심사와 노동 요구 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이라는 기본소득 설명 이상으로 논의가 진전되진 않았다.
내가 학술대회에서 느낀 건 참석자들의 당혹감이었다. 과연 기본소득은 무엇일까. 이게 가능은 할까.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은 공유하지만 딱히 내켜하지 않는 공기가 떠돌았다. 장석준 씨(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는 기본소득을 당론으로 밀어붙이길 주저하고, 양의모 씨(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객원연구위원)는 너무나 손쉽게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주장하는 것 같아 도리어 의문만 커졌다. 그저 브라질, 벨기에,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기본소득 주창자들이 참석했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했을까. 내 솔직한 감상은 그랬다.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트위터에서 어쩌다 기본소득 이야기를 꺼냈다가 지인 한 분과 논쟁을 했다. 기본소득에 어정쩡한 입장이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논쟁을 하면서 과도한 통화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문제 등에 대해 약점이 많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투기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와 부자 증세로 재원을 마련한다는 것도 ‘보편적 복지’의 아이디어로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는 강물 같은 트윗에 휩쓸려 유야무야 되었음에도, 그러나 머릿속에는 여전히 앙금이 남았다. 지금의 기본소득 운동이 제3세계의 실험을 조급하게 도입하려는 설레발 아니냐는 트윗 때문이었다. 기본소득은 정말로, 단순한 설레발에 불과한 것일까?
기본소득 실험은 나미비아와 브라질에서 이제 막 시작되었다. 시장이 파괴된 곳에서 달마다 지급되는 100 나미비아 달러가 불러온 결과들-실업률과 영양실조 아동의 감소 등-을 ‘기적’이라고 부풀릴 생각은 없다. 다만 또 한 번 나는 의문을 품는다.
우리는 늘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시도를 가로막는 게 습관이 된 건 아닐까. 그렇게 늘 주저하다 지금 지방선거 국면에서 보는 것처럼 진보 혹은 좌파만의 프레임을 한나라당에 또 다시 빼앗기고 있는 건 아닐까(한나라당조차 무상급식을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도무지, 그걸 어떻게 해야 깰 수 있을까. 기본소득이 선언으로서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기본소득을 지방선거에서 적에게 승리하기 위한 프레임 전략으로 보기 전에 한 가지 더 생각할 게 있다. “지금 내가, 20대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상상했을 때 무엇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까. 물론 모든 20대가 빈곤하지는 않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20대라는 세대는 빈곤을 거듭할 가능성이 더 높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면서, 그렇게 해서 훼손된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그들 중산층 자녀조차 자신의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한윤형, 도대체 어떻게 ‘진보’하란 말인가?)
한윤형은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의 문제의식을 반복하는 듯하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의 결과는 곧 20대의 만성적인 빈곤 아닐까. 이제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다. 이제 막 스무 고개를 빠져나가 서른에 접어드는 이들은 지난날의 빈곤을 털어내기보단 고스란히 지고 갈 것이다.
새로 스무 살에 진입하는 10대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지금의 10대와 20대는 최저 시급 4천원에 목을 매며 치킨 배달과 서빙,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대학이라는 사회 자본을 가졌을 경우엔 과외라도 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 첫 달에는 수수료 명목으로 떼이기 일쑤다.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오래 빈궁하면 경멸받는다며 자기 신세를 한탄하곤 했다. 빈곤은 종종 정신을 좀먹는다. 지금 당장 20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존감이다. 기본소득을 지급해 구매력을 늘려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을 유지한다는 경제학원론식 계산은 잠시 접어두자. 우선은 자존감이다.
이 자존감은 권리를 말한다. ‘꺾기’를 당하지 않을 권리, 더 나은 노동조건에서 일할 권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등록금에 휘둘리지 않을 권리, 오늘 밥은 어떻게 먹을까 걱정하지 않고 친구를 만날 권리를 말한다. 즉,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다.
지금 기본소득을 말하는 것은, 기초노령연금을 20대에 미리 당겨 받자는 차원이 아니다. 차라리 4대강 개발에 퍼붓는 돈을 20대에게 투자하라는 요구다. 정부고 기업이고 청년이 미래의 희망이고 가능성이라며 입으로만 추켜세우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뭔가를 달라는 요구가 우리 입에서 나와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기본소득 운동은 아직까지는 제3세계의 경험을 주시하는 수준이라고 본다. 이게 당장 대안이 되거나 진보적인 정책의 주류가 될 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은 과거의 긴급한 구호를 부활시킨다.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무상교육, 무상의료.” 그 연장선상에 보편적 복지가 있고, 기본소득이 있다.
나는 진보정당들이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주의라 불리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요구하고 싶다. 오른쪽으로 급히 기운 우리나라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진보정당들은 ‘더욱 더 왼쪽으로’ 가야 한다. 왼쪽으로 가는 길목에 20대가 있다. 세대 문제가 계급, 성차, 지역 문제를 초월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지금 많은 20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게다. 기본소득이 20대에게 갖는 의미다.
(레디앙 기고)
원래 부제는 '기본소득은 20대 빈곤화를 해소할 수 있을까?'였다. 그리고 본문 중간 "한국의 중산층은…'멋진 신세계'다."는 부분은 내가 아니라 한윤형의 것이다(한윤형, <도대체 어떻게 '진보'하란 말인가?>). 레디앙에서 출처를 생략해 다시 써넣는다. 이 글은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와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에 대한 후기를 겸한다(leopord,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참석하렵니다>,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
* 장석준(진보신당 상상연구소) 님에게 : 학술대회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비평에 머문 감이 있습니다. 기본소득에 대한 당내 토론과정을 생략했다는 점 인정합니다. 다만 학술대회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확고한(!) 입장들에 반해, 장석준 님의 태도가 무척 신중해 보였기에 그런 인상이 들었던 듯합니다. 말씀하신 '사회 서비스의 탈상품화'와 기본소득이 어떻게 엮일 수 있을지(공공보건의료, 공공임대주택 등) 풍부한 기획이 당내 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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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5일 기본소득연합 발족식이 열렸다. 장시정 서울 노원구 기초의원 예비후보를 비롯한 사회당 후보들에, 이윤상 충남 천안 기초의원 예비후보 등 진보신당 후보 두 명, 그리고 서울시장 출마로 논란 한가운데 있는 이상규 서울시장 예비후보 등 민주노동당 후보 세 명이 기본소득연합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지방선거 예비후보에 시민단체 활동가, 블로거까지 참여하는 기본소득연합에 이름을 올리는 대신, 발족식 며칠 전에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에 동참했다. 기본소득이 정책으로 구현될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그럼에도 선언은 필요하다. 왜 우리가 ‘보편적 복지’를 말해야 하는지, 왜 ‘사회주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을 하기 전에, 1월 27일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다. 학술대회라곤 해도 ‘어떠한 자산 심사와 노동 요구 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이라는 기본소득 설명 이상으로 논의가 진전되진 않았다.
내가 학술대회에서 느낀 건 참석자들의 당혹감이었다. 과연 기본소득은 무엇일까. 이게 가능은 할까.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은 공유하지만 딱히 내켜하지 않는 공기가 떠돌았다. 장석준 씨(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는 기본소득을 당론으로 밀어붙이길 주저하고, 양의모 씨(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객원연구위원)는 너무나 손쉽게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주장하는 것 같아 도리어 의문만 커졌다. 그저 브라질, 벨기에,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기본소득 주창자들이 참석했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했을까. 내 솔직한 감상은 그랬다.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트위터에서 어쩌다 기본소득 이야기를 꺼냈다가 지인 한 분과 논쟁을 했다. 기본소득에 어정쩡한 입장이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논쟁을 하면서 과도한 통화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문제 등에 대해 약점이 많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투기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와 부자 증세로 재원을 마련한다는 것도 ‘보편적 복지’의 아이디어로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는 강물 같은 트윗에 휩쓸려 유야무야 되었음에도, 그러나 머릿속에는 여전히 앙금이 남았다. 지금의 기본소득 운동이 제3세계의 실험을 조급하게 도입하려는 설레발 아니냐는 트윗 때문이었다. 기본소득은 정말로, 단순한 설레발에 불과한 것일까?
기본소득 실험은 나미비아와 브라질에서 이제 막 시작되었다. 시장이 파괴된 곳에서 달마다 지급되는 100 나미비아 달러가 불러온 결과들-실업률과 영양실조 아동의 감소 등-을 ‘기적’이라고 부풀릴 생각은 없다. 다만 또 한 번 나는 의문을 품는다.
우리는 늘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시도를 가로막는 게 습관이 된 건 아닐까. 그렇게 늘 주저하다 지금 지방선거 국면에서 보는 것처럼 진보 혹은 좌파만의 프레임을 한나라당에 또 다시 빼앗기고 있는 건 아닐까(한나라당조차 무상급식을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도무지, 그걸 어떻게 해야 깰 수 있을까. 기본소득이 선언으로서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기본소득을 지방선거에서 적에게 승리하기 위한 프레임 전략으로 보기 전에 한 가지 더 생각할 게 있다. “지금 내가, 20대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상상했을 때 무엇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까. 물론 모든 20대가 빈곤하지는 않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20대라는 세대는 빈곤을 거듭할 가능성이 더 높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면서, 그렇게 해서 훼손된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그들 중산층 자녀조차 자신의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한윤형, 도대체 어떻게 ‘진보’하란 말인가?)
한윤형은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의 문제의식을 반복하는 듯하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의 결과는 곧 20대의 만성적인 빈곤 아닐까. 이제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다. 이제 막 스무 고개를 빠져나가 서른에 접어드는 이들은 지난날의 빈곤을 털어내기보단 고스란히 지고 갈 것이다.
새로 스무 살에 진입하는 10대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지금의 10대와 20대는 최저 시급 4천원에 목을 매며 치킨 배달과 서빙,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대학이라는 사회 자본을 가졌을 경우엔 과외라도 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 첫 달에는 수수료 명목으로 떼이기 일쑤다.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오래 빈궁하면 경멸받는다며 자기 신세를 한탄하곤 했다. 빈곤은 종종 정신을 좀먹는다. 지금 당장 20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존감이다. 기본소득을 지급해 구매력을 늘려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을 유지한다는 경제학원론식 계산은 잠시 접어두자. 우선은 자존감이다.
이 자존감은 권리를 말한다. ‘꺾기’를 당하지 않을 권리, 더 나은 노동조건에서 일할 권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등록금에 휘둘리지 않을 권리, 오늘 밥은 어떻게 먹을까 걱정하지 않고 친구를 만날 권리를 말한다. 즉,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다.
지금 기본소득을 말하는 것은, 기초노령연금을 20대에 미리 당겨 받자는 차원이 아니다. 차라리 4대강 개발에 퍼붓는 돈을 20대에게 투자하라는 요구다. 정부고 기업이고 청년이 미래의 희망이고 가능성이라며 입으로만 추켜세우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뭔가를 달라는 요구가 우리 입에서 나와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기본소득 운동은 아직까지는 제3세계의 경험을 주시하는 수준이라고 본다. 이게 당장 대안이 되거나 진보적인 정책의 주류가 될 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은 과거의 긴급한 구호를 부활시킨다.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무상교육, 무상의료.” 그 연장선상에 보편적 복지가 있고, 기본소득이 있다.
나는 진보정당들이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주의라 불리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요구하고 싶다. 오른쪽으로 급히 기운 우리나라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진보정당들은 ‘더욱 더 왼쪽으로’ 가야 한다. 왼쪽으로 가는 길목에 20대가 있다. 세대 문제가 계급, 성차, 지역 문제를 초월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지금 많은 20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게다. 기본소득이 20대에게 갖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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