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앤서니 기든스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김현옥 옮김 / 한울, 1997)는 <제3의 길>(2001)의 예비작업으로 씌여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책은 투자은행(IB)과 민영화, 무한경쟁이 상징하는 신자유주의 개혁, 구 소련의 해체를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덧붙여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파도에 저항할 수 밖에 없는 복지국가 모델의 위기라는 세 가지 역사적 외부에 좌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든스의 고민을 담고 있다.
2.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든스의 '제3의 길' 노선은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New Labour Party) 강령이 되었고, 당내 개혁과 신노동당 집권기간의 영국은 끝내 책 제목과는 반대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지 못한 채 극우파의 지렛대에 걸려 넘어진 것만 같다. 블레어는 기든스가 구상했던 길과 너무 멀어졌다. 그러나 개혁에 따른 책임을 블레어에게만 덮어씌우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기든스의 '제3의 길', 우리나라에 와서는 '중도·실용'으로 받아들여지는 노선 자체의 한계에서 도출된, 어찌 보면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3. 그럼에도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를 실패한 중도정치의 기획으로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부제인 <급진 정치의 미래(The Future of Radical Politics)>가 명시하듯이, 기든스는 급진주의(radical) 정치의 현재와 전망을 담아내려 노력한다. 그 노력은 탈냉전이 꾸준히 진행되던 1994년에 대한 명확한 통찰로 보상을 받는다.
4. 기든스에 따르면 세계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온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전지구화와 전통, 불확실성이 그렇다. 기든스는 당대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상당히 유연한 입장을 취하면서 탈냉전화·탈근대화·탈전통화하는 세계를 거시적으로 그려보려고 노력한다. 그가 보았을 때 세계는 네트워크성이 깊어져 개인의 삶이 지역 공동체 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시공간에 영향을 주고 또 반대로 거대한 세계적 변화가 개인적이고 국지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자본의 전지구화'로 종종 해석되었던 자본주의의 심화경향이 끌어낸 역사적 경향이기도 한데, 네트워크성의 심화가 전통의 재규정과 불확실성의 심화로 이어진다는 분석은 지금에 와서는 새롭지만은 않다(1994년의 한국에선 물론 핫하고 꽤 섹시했을 테지만.).
5. 기든스는 '노동-세대-성-가족' 이라는 네 가지 요소 사이의 다이아몬드형 구성으로 세계를 이론적으로 분석한다. 책 후반의 탈전통사회에서의 성 역할 변화나, 생태학의 근본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보다, 책 초반의 보수주의 분석과 복지국가의 맹점 비판이 더 눈에 띈다. 책 속 표제들이 드러내는 것처럼 보수주의는 급진화되고, 사회주의는 보수화되었다는 분석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개혁에 따른 보수주의의 이념적 분열과, 좌파의 임무가 복지국가를 공격하는 데서 옹호하는 것으로 선회한 역설에 따른 것이다.
6. 특히 기든스의 통찰은 근대 복지국가의 맹점을 짚을 때 가장 빛난다. 요컨대 근대 복지국가는 가부장적이고 남성노동자 중심적이며, 2차 대전기의 전시 사회주의 경험에 바탕한 사이버네틱 모델(중추부가 하부신경을 지배한다는 신경 메커니즘 이론. 사이버네틱 모델은 초창기의 기계론적 관점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 같다. 위키백과, <사이버네틱스>)에 따른 것으로, 사회적 성찰성이 낮은 사회에선 유효했으나 성찰성이 높은 사회에서는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단적으로 작년 촛불집회 때 광우병에 대한 논란이 프리온 괴담 등 심각한 오류를 포함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보다 많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다는 게 한 예가 될 것이다.
성찰성이 심화된 세계는 영리한 인간들의 세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이전보다 더 지성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탈전통적 질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각 개인들은 더 광범위한 세계에 어느 정도 참여해야만 한다. 전문가(과학적 지식을 포함하여)가 생산한 정보는 더 이상 특정 집단에만 한정될 수 없으며,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일상의 행위과정에서 해석되고 운영된다. (p.19) 굵은 글씨는 글쓴이 강조.
7. 기든스가 가장 우려했던 경향은 근본주의이다. 이 근본주의는 전통을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용할 수 없는 탈전통화된 세계에서 전통에 대한 의례적이고 무비판적인 태도가 고집되는 역설을 반영한다. 아마도 혹자들은 근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곳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기든스는 근본주의는 도처에 있다고 설명한다.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시장자유화를 위해 세계를 급진적으로 파괴하면서도 시장 주체(즉, 기업과 가부장들!)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보수적인 가족과 순결한 성관념에 의존한다는 모순은 신자유주의가 시장과 가족에 대해 품고 있는 근본주의와 엮이면서 더욱 강력하고 복잡해진다. AIDS 퇴치는 왜 하필이면 레이건 정부 때 강력하게 추진되었던가? 공화당과 보수 기독교는 성스러운 가족을 지키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던가? 그리고 '지금/여기'의, 명박 시대를 위해 하나님 아바아버지를 부르짖는 한국 보수교단은?
8. 근본주의에 대항할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기든스 또한 대화와 소통을 급진정치의 주요 전략으로 제시한다. 이 때 대화는 어떤 특정한 결론을 도출하고 여론을 수렴하는 것보다 그 자체로 충돌하고 갈등하는 '보증 없는 비판'이라는 점에서 하버마스의 소통 개념과 차이를 드러낸다. 대화와 소통이 유력한 수단인 이유는, 대화가 단절된 자리엔 반드시 폭력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페이비언협회(책 속에서는 '개혁 사회주의' 쯤으로 번역)의 반혁명적(counter-revolutionary) 경향이 반영된 셈인데, 이에 온전히 동의하기 어렵더라도 사실, 대화를 이끌어 내는 과정 자체, 긴장과 갈등을 조정하는 힘이 급진 정치에 필수적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곤란한 점은 끝내 '어떻게'다.
9.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짧은 분량 안에 굉장히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거시적인 관점과 방향은 단조로울지 몰라도, 구좌파의 혁명적 기획이나 보수주의의 가부장 권력이 다 끌어안지 못하는 '삶의 정치' 문제와 '행복'의 문제를 섬세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느 책들이 그렇듯이 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일이지만, 단지 반혁명적이라거나 실패한 중도주의라는 낙인을 찍어 미리 책을 분서갱유해서는 곤란한 일이다.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방향에 관한 책인 동시에, 기술(technic)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급진 정치는 여전히 좌파적이고 앞으로도 좌파일 것이다. 2차원적 평면상에서의 좌-우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을 환기하고, 삶의 문제에 세련되게 접근하는 기술. 책의 효용은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2.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든스의 '제3의 길' 노선은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New Labour Party) 강령이 되었고, 당내 개혁과 신노동당 집권기간의 영국은 끝내 책 제목과는 반대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지 못한 채 극우파의 지렛대에 걸려 넘어진 것만 같다. 블레어는 기든스가 구상했던 길과 너무 멀어졌다. 그러나 개혁에 따른 책임을 블레어에게만 덮어씌우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기든스의 '제3의 길', 우리나라에 와서는 '중도·실용'으로 받아들여지는 노선 자체의 한계에서 도출된, 어찌 보면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3. 그럼에도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를 실패한 중도정치의 기획으로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부제인 <급진 정치의 미래(The Future of Radical Politics)>가 명시하듯이, 기든스는 급진주의(radical) 정치의 현재와 전망을 담아내려 노력한다. 그 노력은 탈냉전이 꾸준히 진행되던 1994년에 대한 명확한 통찰로 보상을 받는다.
4. 기든스에 따르면 세계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온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전지구화와 전통, 불확실성이 그렇다. 기든스는 당대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상당히 유연한 입장을 취하면서 탈냉전화·탈근대화·탈전통화하는 세계를 거시적으로 그려보려고 노력한다. 그가 보았을 때 세계는 네트워크성이 깊어져 개인의 삶이 지역 공동체 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시공간에 영향을 주고 또 반대로 거대한 세계적 변화가 개인적이고 국지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자본의 전지구화'로 종종 해석되었던 자본주의의 심화경향이 끌어낸 역사적 경향이기도 한데, 네트워크성의 심화가 전통의 재규정과 불확실성의 심화로 이어진다는 분석은 지금에 와서는 새롭지만은 않다(1994년의 한국에선 물론 핫하고 꽤 섹시했을 테지만.).
5. 기든스는 '노동-세대-성-가족' 이라는 네 가지 요소 사이의 다이아몬드형 구성으로 세계를 이론적으로 분석한다. 책 후반의 탈전통사회에서의 성 역할 변화나, 생태학의 근본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보다, 책 초반의 보수주의 분석과 복지국가의 맹점 비판이 더 눈에 띈다. 책 속 표제들이 드러내는 것처럼 보수주의는 급진화되고, 사회주의는 보수화되었다는 분석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개혁에 따른 보수주의의 이념적 분열과, 좌파의 임무가 복지국가를 공격하는 데서 옹호하는 것으로 선회한 역설에 따른 것이다.
6. 특히 기든스의 통찰은 근대 복지국가의 맹점을 짚을 때 가장 빛난다. 요컨대 근대 복지국가는 가부장적이고 남성노동자 중심적이며, 2차 대전기의 전시 사회주의 경험에 바탕한 사이버네틱 모델(중추부가 하부신경을 지배한다는 신경 메커니즘 이론. 사이버네틱 모델은 초창기의 기계론적 관점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 같다. 위키백과, <사이버네틱스>)에 따른 것으로, 사회적 성찰성이 낮은 사회에선 유효했으나 성찰성이 높은 사회에서는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단적으로 작년 촛불집회 때 광우병에 대한 논란이 프리온 괴담 등 심각한 오류를 포함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보다 많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다는 게 한 예가 될 것이다.
성찰성이 심화된 세계는 영리한 인간들의 세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이전보다 더 지성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탈전통적 질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각 개인들은 더 광범위한 세계에 어느 정도 참여해야만 한다. 전문가(과학적 지식을 포함하여)가 생산한 정보는 더 이상 특정 집단에만 한정될 수 없으며,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일상의 행위과정에서 해석되고 운영된다. (p.19) 굵은 글씨는 글쓴이 강조.
7. 기든스가 가장 우려했던 경향은 근본주의이다. 이 근본주의는 전통을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용할 수 없는 탈전통화된 세계에서 전통에 대한 의례적이고 무비판적인 태도가 고집되는 역설을 반영한다. 아마도 혹자들은 근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곳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기든스는 근본주의는 도처에 있다고 설명한다.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시장자유화를 위해 세계를 급진적으로 파괴하면서도 시장 주체(즉, 기업과 가부장들!)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보수적인 가족과 순결한 성관념에 의존한다는 모순은 신자유주의가 시장과 가족에 대해 품고 있는 근본주의와 엮이면서 더욱 강력하고 복잡해진다. AIDS 퇴치는 왜 하필이면 레이건 정부 때 강력하게 추진되었던가? 공화당과 보수 기독교는 성스러운 가족을 지키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던가? 그리고 '지금/여기'의, 명박 시대를 위해 하나님 아바아버지를 부르짖는 한국 보수교단은?
8. 근본주의에 대항할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기든스 또한 대화와 소통을 급진정치의 주요 전략으로 제시한다. 이 때 대화는 어떤 특정한 결론을 도출하고 여론을 수렴하는 것보다 그 자체로 충돌하고 갈등하는 '보증 없는 비판'이라는 점에서 하버마스의 소통 개념과 차이를 드러낸다. 대화와 소통이 유력한 수단인 이유는, 대화가 단절된 자리엔 반드시 폭력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페이비언협회(책 속에서는 '개혁 사회주의' 쯤으로 번역)의 반혁명적(counter-revolutionary) 경향이 반영된 셈인데, 이에 온전히 동의하기 어렵더라도 사실, 대화를 이끌어 내는 과정 자체, 긴장과 갈등을 조정하는 힘이 급진 정치에 필수적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곤란한 점은 끝내 '어떻게'다.
9.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짧은 분량 안에 굉장히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거시적인 관점과 방향은 단조로울지 몰라도, 구좌파의 혁명적 기획이나 보수주의의 가부장 권력이 다 끌어안지 못하는 '삶의 정치' 문제와 '행복'의 문제를 섬세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느 책들이 그렇듯이 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일이지만, 단지 반혁명적이라거나 실패한 중도주의라는 낙인을 찍어 미리 책을 분서갱유해서는 곤란한 일이다.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방향에 관한 책인 동시에, 기술(technic)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급진 정치는 여전히 좌파적이고 앞으로도 좌파일 것이다. 2차원적 평면상에서의 좌-우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을 환기하고, 삶의 문제에 세련되게 접근하는 기술. 책의 효용은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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