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학기 <성과 문학> 강의 과제였다. 새삼 들춰보는 것은 블로그 아직 안 죽었음을 밝히려는 수작남녀 관계에 대한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나올까 생각하다가 싶어서. 그러고 보면 나도 딱히 연애 관련한 글을 자세히 썼던 적은 없었던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연애밸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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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킹 게임> : 연애는 게임이다
0.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작품 <농담>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전혀 읽어본 적이 없다. 강의록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남미 작가인 줄 알았다. 마르께스나 보르헤스 등과 혼동한, 언어의 착각이었다. 다만 이 착각에 대한 변명 한 가지. 그의 글 <히치하이킹 게임>에선 변경의 냄새가 났다.
1. <히치하이킹 게임>은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길 위의 이야기다. 영화로 옮겨놓는다면 한 편의 로드무비 쯤 될 게다. 소설은 자동차에 연료가 다 떨어지는 걸로 시작한다. 이들은 여행 중이다. 각자 삶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 도시인들이고, 가정과 직장에서 반복적으로 치이는, 단조롭고 나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조신한 여자와 사려 깊은 남자라는 제법 근사한 조합은, 작가가 두 사람의 애정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만큼 평범해진다. 이들은 탈출구를 원했기에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이란 미리 휴가를 받아놓고 호텔을 잡아놓은 예약된 것, 제도의 틀에 포섭된 것이기에 온전한 의미의 일탈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제도화되고 유예된 일탈 안에서 또 다른 일탈을 꿈꾼다. 이야기는 자동차에 연료를 가득 채우면서 전환한다. 파문을 먼저 일으킨 건 남자였다. “아가씨, 어디로 가려는데요?” 여자가 되묻는다. “비스뜨리쩨로 가요?” 게임이 시작되었다.
2. 이 둘이 벌이는 게임은 체스라기보단 포커에 가깝다. 단, 둘 다 상대가 낼 수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포커와 다르다. 이 게임에서 여자와 남자의 위치는 얼핏 동등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는 짐짓 도도한 척 남자를 쏘아붙이고, 남자는 능글맞게 그에 대응한다. 처음에 남자는 여자가 갖고 있는 카드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여자가 낼 수 있는 카드는 투 페어이고, 나는 트리플을 갖고 있으니 이만 게임을 끝내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녀가 낸 것은 풀 하우스였다. 남자는 여자를 향해 내민 팔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게임이 뒤틀리는 순간이었다.
신앙은 기도하는 행위로부터 나온다. 스피노자였던가, 파스칼이었던가. 누가 한 말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때부터 여자도 남자도 게임이라는 행위를 통해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간다. 여자는 자기 안의 욕망을 발견하고, 남자는 그 욕망을 혐오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성녀와 창녀라는, 남성의 교조화된 판타지의 배치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욕망을 직시하고 욕망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자는 원래 휴양지인 따뜨리를 버리고 노베 잠끼로 향한다. 진짜 일탈이 시작된 것이다.
3. 이제 둘 다 게임을 멈출 수 없다. 게임의 행위자는 승리를 추구한다. 승리는 삶이고, 패배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사실 게임의 종결 자체가 곧 죽음이다. 모든 사랑은 죽음과 맞닿아있다. 노베 잠끼의 레스토랑에서 여자는 무한질주하는 게임판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걸음이 농염할수록 주위 남자들의 시선은 노골적이 되고, 파트너의 질투와 혐오감도 짙어진다. 드디어 클라이맥스. 둘이 침실에 들어가 섹스를 할 때, 여자는 그제야 게임을 끝내고 싶어한다. 그녀는 카드를 내려놓고 이제 무승부로 게임을 끝내자고 제안한다. 이번엔 남자가 거절한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에이스를 집어던지면서 말한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에게만 키스해.” 여자가 되묻는다. “그럼 난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누굴 사랑하는데?”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벗기나 해!”
4. 게임은 끝났다. 두 행위자 사이의 평등한 관계와 공정한 심판은 허구였다. 여자는 그 허구에 보기 좋게 놀아나고 만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어리석음이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건, 그녀는 여행 전까지는 조신하고 단정한 여자라는 배치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유지하길 강요당했던 욕망도, 또 새로운 자신이라고 착각했던 욕망도 모두 타인(남성)의 것이었다. 그녀는 가해자이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였다. “나는 나야, 나는 나야, 나는 나야…….” 마지막, 그녀의 언어가 공허한 이유다. 그들 앞에 남은 13일의 휴가는 앞으로의 관계의 균열과 퇴락을 암시한다. 아마도 남자는 여자와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5. 연애를 하나의 게임으로 설정하고 공식을 인수분해 하듯 분석하는 태도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고 (나를 포함한) 젊은 사람들이 갈수록 영리해지는 요즘 시대에 특히 익숙한 일이다. 이런 연애론에 대한 동의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연애관계란 알게 모르게 게임이 된다. 게임화된 관계가 가장 자주 나타나는 현장은 소개팅 자리다. 외모-재력-성격 순으로 훑고 나면 이제 탐색에 들어간다.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오늘은 어느 선까지 용인할지(남자의 입장에선 어느 선까지 뚫고 들어갈지)를 계산한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게임이다. 진짜 게임에는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 누가 더 우위에 설 것인가.
지나간 연애 얘기다. 3년간 지속되었다. 애정이 넘치던 시간은 아마 6개월째에서 끝났던 것 같다. 그 뒤부턴 끊임없는 싸움과 화해의 반복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소모했다. 그녀는 나를 좌우하고 싶어했고,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럼에도 일말의 애정과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살정과, 둘 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점이 관계를 지속하는 미약하지만 질긴 끈이었다. 아마 당시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우리 역시 역할놀이(Role-Playing Game)를 하고 있었다. 착한 남자와 나쁜 여자 놀이. 그러나 동시에 나쁜 남자와 약한 여자 놀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였고 또 피해자였다. 이건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권력자의 쪽에 서는, 남자인 자신을 변명하려는 데에 의도가 있지 않다. 단지 지나간 상처를 과장하거나 억지로 치유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6. 쿤데라는 <히치하이킹 게임> 안에서, 여자와 남자의 내밀한 속을 파헤치면서 독자에게 둘 사이의 닿을 수 없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욕망은 또한 기만적이어서 그것이 과연 각자의 진정한 모습이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한다. 작품은 여자의 진짜 욕망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생산된 욕망을 제시함으로써 (체코) 여성의 현실을 폭로하려는 전략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 점에서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히치하이킹 게임>의 연장선에 있다. 소설은 독자에게 묻는다. 너의 욕망은 진정으로 너의 것인가. 그리고 그 욕망은 누가 좌우하고 있는가.
덧붙여 나는 나의 과거에게 묻는다. 나의 욕망은 진정으로 나의 것이었는가. 그리고 그 욕망은 과연 누구의 손에 달린 것이었나. 나는 나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싶어했지만, 나는 내가 가해자였음을 인정하는 걸로 끝맺는 게 나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였기에, 결국 자기 자신만이 자신의 가해자가 되고 말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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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킹 게임> : 연애는 게임이다
0.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작품 <농담>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전혀 읽어본 적이 없다. 강의록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남미 작가인 줄 알았다. 마르께스나 보르헤스 등과 혼동한, 언어의 착각이었다. 다만 이 착각에 대한 변명 한 가지. 그의 글 <히치하이킹 게임>에선 변경의 냄새가 났다.
1. <히치하이킹 게임>은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길 위의 이야기다. 영화로 옮겨놓는다면 한 편의 로드무비 쯤 될 게다. 소설은 자동차에 연료가 다 떨어지는 걸로 시작한다. 이들은 여행 중이다. 각자 삶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 도시인들이고, 가정과 직장에서 반복적으로 치이는, 단조롭고 나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조신한 여자와 사려 깊은 남자라는 제법 근사한 조합은, 작가가 두 사람의 애정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만큼 평범해진다. 이들은 탈출구를 원했기에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이란 미리 휴가를 받아놓고 호텔을 잡아놓은 예약된 것, 제도의 틀에 포섭된 것이기에 온전한 의미의 일탈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제도화되고 유예된 일탈 안에서 또 다른 일탈을 꿈꾼다. 이야기는 자동차에 연료를 가득 채우면서 전환한다. 파문을 먼저 일으킨 건 남자였다. “아가씨, 어디로 가려는데요?” 여자가 되묻는다. “비스뜨리쩨로 가요?” 게임이 시작되었다.
2. 이 둘이 벌이는 게임은 체스라기보단 포커에 가깝다. 단, 둘 다 상대가 낼 수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포커와 다르다. 이 게임에서 여자와 남자의 위치는 얼핏 동등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는 짐짓 도도한 척 남자를 쏘아붙이고, 남자는 능글맞게 그에 대응한다. 처음에 남자는 여자가 갖고 있는 카드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여자가 낼 수 있는 카드는 투 페어이고, 나는 트리플을 갖고 있으니 이만 게임을 끝내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녀가 낸 것은 풀 하우스였다. 남자는 여자를 향해 내민 팔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게임이 뒤틀리는 순간이었다.
신앙은 기도하는 행위로부터 나온다. 스피노자였던가, 파스칼이었던가. 누가 한 말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때부터 여자도 남자도 게임이라는 행위를 통해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간다. 여자는 자기 안의 욕망을 발견하고, 남자는 그 욕망을 혐오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성녀와 창녀라는, 남성의 교조화된 판타지의 배치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욕망을 직시하고 욕망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자는 원래 휴양지인 따뜨리를 버리고 노베 잠끼로 향한다. 진짜 일탈이 시작된 것이다.
3. 이제 둘 다 게임을 멈출 수 없다. 게임의 행위자는 승리를 추구한다. 승리는 삶이고, 패배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사실 게임의 종결 자체가 곧 죽음이다. 모든 사랑은 죽음과 맞닿아있다. 노베 잠끼의 레스토랑에서 여자는 무한질주하는 게임판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걸음이 농염할수록 주위 남자들의 시선은 노골적이 되고, 파트너의 질투와 혐오감도 짙어진다. 드디어 클라이맥스. 둘이 침실에 들어가 섹스를 할 때, 여자는 그제야 게임을 끝내고 싶어한다. 그녀는 카드를 내려놓고 이제 무승부로 게임을 끝내자고 제안한다. 이번엔 남자가 거절한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에이스를 집어던지면서 말한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에게만 키스해.” 여자가 되묻는다. “그럼 난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누굴 사랑하는데?”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벗기나 해!”
4. 게임은 끝났다. 두 행위자 사이의 평등한 관계와 공정한 심판은 허구였다. 여자는 그 허구에 보기 좋게 놀아나고 만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어리석음이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건, 그녀는 여행 전까지는 조신하고 단정한 여자라는 배치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유지하길 강요당했던 욕망도, 또 새로운 자신이라고 착각했던 욕망도 모두 타인(남성)의 것이었다. 그녀는 가해자이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였다. “나는 나야, 나는 나야, 나는 나야…….” 마지막, 그녀의 언어가 공허한 이유다. 그들 앞에 남은 13일의 휴가는 앞으로의 관계의 균열과 퇴락을 암시한다. 아마도 남자는 여자와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5. 연애를 하나의 게임으로 설정하고 공식을 인수분해 하듯 분석하는 태도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고 (나를 포함한) 젊은 사람들이 갈수록 영리해지는 요즘 시대에 특히 익숙한 일이다. 이런 연애론에 대한 동의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연애관계란 알게 모르게 게임이 된다. 게임화된 관계가 가장 자주 나타나는 현장은 소개팅 자리다. 외모-재력-성격 순으로 훑고 나면 이제 탐색에 들어간다.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오늘은 어느 선까지 용인할지(남자의 입장에선 어느 선까지 뚫고 들어갈지)를 계산한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게임이다. 진짜 게임에는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 누가 더 우위에 설 것인가.
지나간 연애 얘기다. 3년간 지속되었다. 애정이 넘치던 시간은 아마 6개월째에서 끝났던 것 같다. 그 뒤부턴 끊임없는 싸움과 화해의 반복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소모했다. 그녀는 나를 좌우하고 싶어했고,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럼에도 일말의 애정과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살정과, 둘 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점이 관계를 지속하는 미약하지만 질긴 끈이었다. 아마 당시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우리 역시 역할놀이(Role-Playing Game)를 하고 있었다. 착한 남자와 나쁜 여자 놀이. 그러나 동시에 나쁜 남자와 약한 여자 놀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였고 또 피해자였다. 이건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권력자의 쪽에 서는, 남자인 자신을 변명하려는 데에 의도가 있지 않다. 단지 지나간 상처를 과장하거나 억지로 치유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6. 쿤데라는 <히치하이킹 게임> 안에서, 여자와 남자의 내밀한 속을 파헤치면서 독자에게 둘 사이의 닿을 수 없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욕망은 또한 기만적이어서 그것이 과연 각자의 진정한 모습이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한다. 작품은 여자의 진짜 욕망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생산된 욕망을 제시함으로써 (체코) 여성의 현실을 폭로하려는 전략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 점에서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히치하이킹 게임>의 연장선에 있다. 소설은 독자에게 묻는다. 너의 욕망은 진정으로 너의 것인가. 그리고 그 욕망은 누가 좌우하고 있는가.
덧붙여 나는 나의 과거에게 묻는다. 나의 욕망은 진정으로 나의 것이었는가. 그리고 그 욕망은 과연 누구의 손에 달린 것이었나. 나는 나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싶어했지만, 나는 내가 가해자였음을 인정하는 걸로 끝맺는 게 나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였기에, 결국 자기 자신만이 자신의 가해자가 되고 말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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