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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umfabrik

잡감 : <잘 알지도 못하면서>

by parallax view 2009. 7. 14.

0. PD저널 원고를 방금 보냈고, 200자 원고지 7매만으로는 다 하지 못한 이야기는 여기에.

1. 우선 불평부터 : 이런 영화를 겨우 원고지 7장 안에서 다 이야기해야 한다니, 이건 멍청한 짓이야. 게다가 이 영화는 한 번 봐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몇 번이고 봐야할 거 같아. 그런데 중앙시네마는 이미 내렸으니 어디서 본담? 있을 때 한참 봤어야 했는데.

2. 원고엔 전혀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배우는 엄지원이다. 그녀는 영화제 프로그래머 공현희의 속내를 파고들어가 온전히 그녀가 된 것만 같았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그녀가 스스로 고른 금자씨 풍의 드레스에서 드러난 배의 곡선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섹슈얼리티보다 더 세게 다가오는 건 술자리 시퀀스에서 술에 취해 자신에게 고깝게 대하는 후배를 매섭게 몰아붙일 때. 정말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 같은, 데자뷰가 스쳐지나간다. 그게 홍상수 영화 스타일일까.

3. 엄지원 이야기 조금만 더 : 허리우드 극장 옆, 그러니까 서울아트시네마 벽 한켠에는 감독과 배우들을 찍어놓은 사진들이 걸려있다. 저마다 아우라가 있지만, 난 엄지원과 홍상수가 같이 있는 사진이 가장 좋다. 담배를 입에 물고 선 엄지원에게 홍상수가 라이터 불을 내민다. 엄지원은 가녀린 듯 삐딱하다. 그 장면이 그대로 하나의 씬인 것 같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4. 난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찾았을 때에야 흥행감독이 소설가 김연수인 줄 알았다. 나는 홍상수 영화를 잘 모른다. <오!수정>(2000)이 고작이다. 수정씨, 이리 와요! 수정씨! 재훈(정보석)이 애타게 수정(이은주)을 부를 때, 당연히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라면 오겠니?

5. 뒤늦게 찾아본 <씨네21>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사(김용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작가의 유쾌한 관찰>)는 예의 들뢰즈를 인용하고 있다. 요즘은 잘 읽지 않지만 예전에 <씨네21>을 훑어볼 때마다, 꼭 홍상수 영화를 독해할 때의 텍스트로 들뢰즈를 동원하지 않았던가 떠올린다. 솔직히 이 기억은 불확실하다. 어쨌든 본문에 인용된 들뢰즈로 인해, 글의 난이도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이 글보다는 <배우 7인이 말하는 홍상수 혹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나, 감독 인터뷰(<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다른 게 보인다>)가 더 끌린다. 그럼에도 이런 독법은 유효하다. 조금만 더 대중적이었다면 싶기도 한데, 그게 또 씨네21의 매력 아님? (뒷수습 하는 거 아닙니다.)

6. 영화 자체는 엄청 유쾌하다거나 한 건 아니다. 구경남(김태우)을 보고 있으면 불쾌한 게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걸 어쩌라고. 그건 구경남에 자신을 투사하기 때문이겠지만, 똑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소한 경험들이 카메라를 통해 눈 앞에 확대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 같은 것이다. 만약 동행이 있었다면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야, 나도 저래?

7. 그런데 자꾸 쿡쿡거리며 웃게 되는 거다. 블랙유머가 톡톡 튀는데, 시트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상황극 하나하나가 괜히 우스운 거다. 웃고 싶지 않은데 까마귀 깃털로 막 발바닥을 간질이는 그런 기분. 김태우 연기가 너무 좋다. 얄미울 정도다. 정말 저렇게 사는 건 아니겠지 싶을 정도로. 또, 자기 제자의 애정행각에 대한 질투에 눈이 번들거리면서도 "야, 늬들 나한테 엉까지마!" 라며 학생들 인기관리하는 꼰대 고 과장(유준상)이나, "선생님, 너무 억울합니다" 하고 훌쩍거리는 조씨(하정우)나 다들 왜 이리 연기가 물이 올랐다니. 물 많은 곳곳에서 찍어서 그런가.

8. 이 영화는 정말 말할 게 너무 많은 영화다. 한 번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주절대는 것도 고순(고현정) 때문이다.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래서 내가 아는데까지만 이야기해 보려고 하는데, 이것도 뭔가 좀 아슬아슬하다. 이렇게 속내를 고스란히-적어도 지금의 나는 나름 열심이다-드러내도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