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래 알고 있는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로서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는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복음주의 청년활동에 참여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직은 경제학 공부를 더 하고 싶다. 얘길 하니, 경제학의 시대는 이제 지났단다. 몇 년 전만 해도 경제학 공부하는 걸 추천했겠지만. 공부라는 것이 한번 붙들면 경제학적으로 말해 탄력성이 떨어져, 유행에 따라 그 때 그 때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통화를 끊고 잠시 생각해보니 확실히 지금은 경제학 무용론이 나올 법하다. 맑스주의 경제학자 류동민이 쓴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의 광고문구는 보다 공격적이다. “경제학의 시대는 끝났다!” 적어도 지금 같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국내경기불황은 가격에 따른 수요/공급의 합리적 조정이 불가능한 시장실패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해법은 분분하지만, 어느 누구도 확답을 제시하진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뭐든지 경제가치(가격)로 환산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옳다고(goods) 외쳤던 사람들 중 누구도 시장실패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이 시대에, 경제학의 가치를 다시 돌아본다는 것도 어딘가 우스운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최호진, 정해동 역/범우사, 1992)은 근대 경제학의 시작으로서, 또, 한편의 근사한 역사라는 점에서 여전히 힘이 세다. 마크 트웨인은 고전은 누구나 이름은 알고 있으나 아무도 읽길 원치 않는 책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경제학을 전공하거나 관심이 있는 학생들 중에 <국부론>을 읽는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역시 경제학적으로 말해,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프와 수식으로 깔끔하게 설명가능한 현대 경제학의 영역에서, 문장의 힘으로 오롯이 영국과 세계경제의 역사를 이야기한 <국부론>은 비효율의 영역에 속한다. 영어원본과 일본어번역본을 비교하며 번역하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어-일본어 중역의 습관이 남아있는 문장은 또 껄끄럽다. 그러나 난해한 껍질을 벗기고 보면 애덤 스미스의 진중한 문제의식과 세련된 문장이 빛을 발한다.
애덤 스미스는 영국 경험론의 전통 위에 서서 수도원 고문서를 포함한 잡다한 자료를 뒤져가며 최대한 사실에 기반을 둔 서술을 고집한다(한편 E.캐넌은 각주에서 그 자료들에 대한 스미스의 고증에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는 걸 지적했다.). 여기서 아주 유명한 문구,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대한 묘사는 비봉출판사판 <국부론>의 김수행 교수가 지적했듯 딱 한 문단에 불과하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완전한 이탈과 해방을 선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의 부를 사회의 전체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고 자연적으로 분배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자연(Nature)이라는 개념도 시장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기보다 개개인의 의지와 역사적 우연의 결합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는 전쟁(특히 7년전쟁)과 식민지라는, 당시 영국을 둘러싼 국제정치경제 최대의 이슈를 다루면서 어떻게 해야 영국민 모두가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그는 <국부론>에서 몸의 건강을 다루고, <도덕감정론>에서는 마음의 건강을 다룸으로써 조화로운 이상세계를 꿈꿨다.). 애덤 스미스는 영국이 금·은의 수입을 위해 자국민과 식민지를 착취하는 현실을 점잖게 비판하는 한편, 그 최첨단에 선 중상주의 경제논리와 격렬하게 싸운다. 그는 시장주의자 내지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상찬과 반대로, 당시 가장 급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제국의회가 아메리카 식민지 대표를 포용할 것과 국왕의 사냥터를 매각할 것을 주장했고, 무엇보다 왕정국가의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교류를 지지했다.).
<국부론>에 따르면 노동은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원동력이고, 축적된 자본이 더 많은 노동의 사용을 보장할 것이기에 축적은 자본주의의 본질이고 속성이다(여기서 새로운 계급,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이 탄생한다.). 그리고 산업의 자연적 발전의 우선순위는 농업>공업>상업 순이어야 한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의 통찰은 역사를 단순히 도식화한 것이 아니라, 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이 역사적 우연에 따른다는 걸 파악한데에 있다. 시장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마을공동체, 더 나아가 국가와의 역사적 관계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국부론>에는 현대 경제학의 분야와 이슈가 총망라되어 있다.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국제무역론, 재정학, 경제사 등 오늘날 분화되어 있는 학문/분과가 혼합되어 있는데다, 당대의 가장 민감한 이슈를 다룬 만큼 그에 대한 해석과 현대 적용을 위한 전략에 있어서 무수히 많은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고전은 해석을 통해 다시 쓰여지기 마련이다. 좀 더 대담하게 말해보자. 경제학은 <국부론>의 해석과 재해석,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충돌의 역사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즉 금융의 과잉팽창과 그 결과인 시장실패를 국가주도의 경제로 복구하려는 케인즈주의적 해석에서부터, 시장이 사회에 착근하지 못한 것을 실패의 원인으로 진단하는 폴라니식 해석까지 분분하다. 1776년 출간 이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당시 가장 뜨거운 책이었다.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가 미궁에 빠져있는 현재, <국부론>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국부론 - 상
아담 스미스 지음, 정해동 옮김 / 범우사
나의 점수 : ★★★★★
경제학의 시작.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대 앞에서 물어본다.
스미스 아저씨, 어디로 가시나요?
통화를 끊고 잠시 생각해보니 확실히 지금은 경제학 무용론이 나올 법하다. 맑스주의 경제학자 류동민이 쓴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의 광고문구는 보다 공격적이다. “경제학의 시대는 끝났다!” 적어도 지금 같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국내경기불황은 가격에 따른 수요/공급의 합리적 조정이 불가능한 시장실패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해법은 분분하지만, 어느 누구도 확답을 제시하진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뭐든지 경제가치(가격)로 환산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옳다고(goods) 외쳤던 사람들 중 누구도 시장실패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이 시대에, 경제학의 가치를 다시 돌아본다는 것도 어딘가 우스운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최호진, 정해동 역/범우사, 1992)은 근대 경제학의 시작으로서, 또, 한편의 근사한 역사라는 점에서 여전히 힘이 세다. 마크 트웨인은 고전은 누구나 이름은 알고 있으나 아무도 읽길 원치 않는 책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경제학을 전공하거나 관심이 있는 학생들 중에 <국부론>을 읽는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역시 경제학적으로 말해,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프와 수식으로 깔끔하게 설명가능한 현대 경제학의 영역에서, 문장의 힘으로 오롯이 영국과 세계경제의 역사를 이야기한 <국부론>은 비효율의 영역에 속한다. 영어원본과 일본어번역본을 비교하며 번역하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어-일본어 중역의 습관이 남아있는 문장은 또 껄끄럽다. 그러나 난해한 껍질을 벗기고 보면 애덤 스미스의 진중한 문제의식과 세련된 문장이 빛을 발한다.
애덤 스미스는 영국 경험론의 전통 위에 서서 수도원 고문서를 포함한 잡다한 자료를 뒤져가며 최대한 사실에 기반을 둔 서술을 고집한다(한편 E.캐넌은 각주에서 그 자료들에 대한 스미스의 고증에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는 걸 지적했다.). 여기서 아주 유명한 문구,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대한 묘사는 비봉출판사판 <국부론>의 김수행 교수가 지적했듯 딱 한 문단에 불과하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완전한 이탈과 해방을 선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의 부를 사회의 전체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고 자연적으로 분배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자연(Nature)이라는 개념도 시장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기보다 개개인의 의지와 역사적 우연의 결합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는 전쟁(특히 7년전쟁)과 식민지라는, 당시 영국을 둘러싼 국제정치경제 최대의 이슈를 다루면서 어떻게 해야 영국민 모두가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그는 <국부론>에서 몸의 건강을 다루고, <도덕감정론>에서는 마음의 건강을 다룸으로써 조화로운 이상세계를 꿈꿨다.). 애덤 스미스는 영국이 금·은의 수입을 위해 자국민과 식민지를 착취하는 현실을 점잖게 비판하는 한편, 그 최첨단에 선 중상주의 경제논리와 격렬하게 싸운다. 그는 시장주의자 내지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상찬과 반대로, 당시 가장 급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제국의회가 아메리카 식민지 대표를 포용할 것과 국왕의 사냥터를 매각할 것을 주장했고, 무엇보다 왕정국가의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교류를 지지했다.).
<국부론>에 따르면 노동은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원동력이고, 축적된 자본이 더 많은 노동의 사용을 보장할 것이기에 축적은 자본주의의 본질이고 속성이다(여기서 새로운 계급,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이 탄생한다.). 그리고 산업의 자연적 발전의 우선순위는 농업>공업>상업 순이어야 한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의 통찰은 역사를 단순히 도식화한 것이 아니라, 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이 역사적 우연에 따른다는 걸 파악한데에 있다. 시장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마을공동체, 더 나아가 국가와의 역사적 관계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국부론>에는 현대 경제학의 분야와 이슈가 총망라되어 있다.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국제무역론, 재정학, 경제사 등 오늘날 분화되어 있는 학문/분과가 혼합되어 있는데다, 당대의 가장 민감한 이슈를 다룬 만큼 그에 대한 해석과 현대 적용을 위한 전략에 있어서 무수히 많은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고전은 해석을 통해 다시 쓰여지기 마련이다. 좀 더 대담하게 말해보자. 경제학은 <국부론>의 해석과 재해석,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충돌의 역사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즉 금융의 과잉팽창과 그 결과인 시장실패를 국가주도의 경제로 복구하려는 케인즈주의적 해석에서부터, 시장이 사회에 착근하지 못한 것을 실패의 원인으로 진단하는 폴라니식 해석까지 분분하다. 1776년 출간 이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당시 가장 뜨거운 책이었다.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가 미궁에 빠져있는 현재, <국부론>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국부론 - 상
아담 스미스 지음, 정해동 옮김 / 범우사
나의 점수 : ★★★★★
경제학의 시작.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대 앞에서 물어본다.
스미스 아저씨, 어디로 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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