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2004년 <신동아>에서 중문과 전병준 교수가 연재하던 ‘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에서였다. 여성무협작가라는 포지션도 특별했지만, 기존 무협소설과는 다르게 인물의 내·외적 갈등을 섬세하게 끌어냈다는 평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무협소설도 시대배경이나 설정을 소위 순문학과 달리할 뿐이지, 갈등구조나 플롯에서는 오히려 굉장히 뚜렷한 경향이 있다. 적과 칼을 맞대고 싸운다는, 뚜렷한 적대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마다 싸움의 이유가 분명해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를 따라가는 한편으로 그 변두리의 이야기를 꾸며내기에도 좋은 장르다. 무협소설계의 절대고수 김용(金庸)이 <녹정기>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음에도 끊임없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고도로 복잡한 갈등구조에 있다.
무협소설이 중국(정확하게는 대만을 비롯한 화교문화권)의 대중오락으로 수입된 이래, 한국에서도 이런 경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르라는 것이 비록 어느 정도 고정된 클리셰에 의존한다고는 하지만 거기서 어긋나는 이단아들은 꼭 있게 마련이다. 정의와 의협(義俠)이라는 전통적 가치에 반기를 든 서효원(그 또한 권력에 대한 환멸이라는 점에서 노장(老莊)의 계보를 따르면서도 종종 극단적으로 파괴된 인간관계와 죽음을 통해 데카당스로 빠진다.), 무협을 이해집단 간의 정치투쟁 공간으로 이해한 좌백의 초기작품(<대도오>)은 한국무협이 서 있는 정서적 위치를 다소나마 변형시켰다. 진산(우지연) 역시 이미 중화무협과는 거리가 멀어진 한국무협에 독특한 장을 열어놓은 작가다.
<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진산/파란미디어, 2007)은 한국 최초의 무협단편집으로 유일하고 특별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 도입부에 들어간 <광검유정>(1994)을 비롯해 그녀가 하이텔 무협동에서 활동할 때 내놓은 과거 작품들의 모음이란 점에서 다소 신선함이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고기만두>(1997) 이하 매란국죽(梅蘭菊竹) 연작이 단편집의 무게를 보충해준다. 보통 여성작가는 무협이나 SF/판타지에 약하다는 편견을 일찌감치 무너뜨린 김혜린이나 신일숙, 강경옥, 황미나 같은 만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진산 역시 서사와 정서 양쪽을 놓치지 않고 각각의 가치가 어떻게 충돌하고 공존하는가를 작품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녀가 작품마다 달아놓은 주에서 설명하듯이, 그녀의 문제의식은 정(情)이다. 이 정이 살부(殺父)의 충동이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재생산(주체가 여성이란 점에서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반어적 해석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으로 발현되든(광검유정), 대의(大義)에 희생당하는 약자의 저항으로 나타나든(청산녹수), 혹은 가질 수 없는 여자(남자)를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드러나든(백결검객) 이들 정은 모두 금기(禁忌, 터부)와 직결되어 인물과 독자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이 고통이 행복하게 해결되는 <고기만두>와 <웃는 매화>가 사군자(四君子) 연작을 밝게 채색한다면, <날아가는 칼>과 <잠자는 꽃>은 퇴락한 고궁(古宮)의 뒷모습처럼 쓸쓸하다.
2인칭서술을 채용한 마지막 작품 <잠자는 꽃>(2006)은 그 서술기법과 함께 캐릭터들에 대한 풍부한 묘사로 많은 주목을 받는 작품이지만, 오히려 무협이라는 틀로 보았을 때는 <날아가는 칼>(2003)이 더욱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진산이 무협이라는 장르에 대해 취하고 있던 스탠스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지점이라는 것에서 더욱 주목된다.
진산은 민해연이라는 필명으로 로맨스소설을 쓰는 외에도, <가스라기>로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녀로선 더 이상 무협소설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하게는 무협의 클리셰가 더 이상 그녀의 세계를 끌어안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아직 진산의 작품세계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 한때 좌백의 블로그 등을 통해 그들의 희화화된 사생활을 즐거이 감상했지만, 진산은 자신의 다음 작품을 블로그에서 드러나는 것만큼 쉽사리 드러내줄 것 같지 않다는 것.
진산 무협 단편집
진산 지음 / 파란미디어
나의 점수 : ★★★★
한국 최초의, 어쩌면 최후의 무협 단편집일지도 모를 소설집.
사실 무협소설도 시대배경이나 설정을 소위 순문학과 달리할 뿐이지, 갈등구조나 플롯에서는 오히려 굉장히 뚜렷한 경향이 있다. 적과 칼을 맞대고 싸운다는, 뚜렷한 적대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마다 싸움의 이유가 분명해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를 따라가는 한편으로 그 변두리의 이야기를 꾸며내기에도 좋은 장르다. 무협소설계의 절대고수 김용(金庸)이 <녹정기>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음에도 끊임없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고도로 복잡한 갈등구조에 있다.
무협소설이 중국(정확하게는 대만을 비롯한 화교문화권)의 대중오락으로 수입된 이래, 한국에서도 이런 경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르라는 것이 비록 어느 정도 고정된 클리셰에 의존한다고는 하지만 거기서 어긋나는 이단아들은 꼭 있게 마련이다. 정의와 의협(義俠)이라는 전통적 가치에 반기를 든 서효원(그 또한 권력에 대한 환멸이라는 점에서 노장(老莊)의 계보를 따르면서도 종종 극단적으로 파괴된 인간관계와 죽음을 통해 데카당스로 빠진다.), 무협을 이해집단 간의 정치투쟁 공간으로 이해한 좌백의 초기작품(<대도오>)은 한국무협이 서 있는 정서적 위치를 다소나마 변형시켰다. 진산(우지연) 역시 이미 중화무협과는 거리가 멀어진 한국무협에 독특한 장을 열어놓은 작가다.
<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진산/파란미디어, 2007)은 한국 최초의 무협단편집으로 유일하고 특별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 도입부에 들어간 <광검유정>(1994)을 비롯해 그녀가 하이텔 무협동에서 활동할 때 내놓은 과거 작품들의 모음이란 점에서 다소 신선함이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고기만두>(1997) 이하 매란국죽(梅蘭菊竹) 연작이 단편집의 무게를 보충해준다. 보통 여성작가는 무협이나 SF/판타지에 약하다는 편견을 일찌감치 무너뜨린 김혜린이나 신일숙, 강경옥, 황미나 같은 만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진산 역시 서사와 정서 양쪽을 놓치지 않고 각각의 가치가 어떻게 충돌하고 공존하는가를 작품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녀가 작품마다 달아놓은 주에서 설명하듯이, 그녀의 문제의식은 정(情)이다. 이 정이 살부(殺父)의 충동이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재생산(주체가 여성이란 점에서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반어적 해석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으로 발현되든(광검유정), 대의(大義)에 희생당하는 약자의 저항으로 나타나든(청산녹수), 혹은 가질 수 없는 여자(남자)를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드러나든(백결검객) 이들 정은 모두 금기(禁忌, 터부)와 직결되어 인물과 독자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이 고통이 행복하게 해결되는 <고기만두>와 <웃는 매화>가 사군자(四君子) 연작을 밝게 채색한다면, <날아가는 칼>과 <잠자는 꽃>은 퇴락한 고궁(古宮)의 뒷모습처럼 쓸쓸하다.
2인칭서술을 채용한 마지막 작품 <잠자는 꽃>(2006)은 그 서술기법과 함께 캐릭터들에 대한 풍부한 묘사로 많은 주목을 받는 작품이지만, 오히려 무협이라는 틀로 보았을 때는 <날아가는 칼>(2003)이 더욱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진산이 무협이라는 장르에 대해 취하고 있던 스탠스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지점이라는 것에서 더욱 주목된다.
진산은 민해연이라는 필명으로 로맨스소설을 쓰는 외에도, <가스라기>로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녀로선 더 이상 무협소설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하게는 무협의 클리셰가 더 이상 그녀의 세계를 끌어안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아직 진산의 작품세계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 한때 좌백의 블로그 등을 통해 그들의 희화화된 사생활을 즐거이 감상했지만, 진산은 자신의 다음 작품을 블로그에서 드러나는 것만큼 쉽사리 드러내줄 것 같지 않다는 것.
진산 무협 단편집
진산 지음 / 파란미디어
나의 점수 : ★★★★
한국 최초의, 어쩌면 최후의 무협 단편집일지도 모를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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