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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by parallax view 2009. 2. 24.
 한국에서 환상문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판타지소설’을 쓴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판타지소설이 대개 RPG의 매너리즘적 축소재생산이라는 걸 전제로 한다면 그렇다. 여기서 김민영의 <팔란티어(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나 김상현의 <탐그루>가 게임과 현실, 그리고 게임과 소설 사이의 긴장을 영리하게 포착한 판타지소설이란 점에서 국내환상문학의 선구적인 작품이랄 수 있으며, 기존 판타지소설의 유통구조 안에서 나름의 문제의식을 구축했다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일이다.

무엇보다 환상문학과 판타지소설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출판/유통방식에 있다. 판타지소설이 PC통신/인터넷의 창작물을 출판하여 혹은 전업작가를 기용하여 대여점/만화방에 유통하는 방식으로 상업화되었다면, 환상문학은 대여점 중심의 출판을 포기하고 웹진<거울>이나 <판타스틱> 등을 통한 비주류 루트 혹은 출판시장루트를 개척하고자 한다.(이영도나 전민희 등은 예외로 해두자.) 여기서 어디가 더 우월하다 하지 않다를 논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더구나 순문학과 판타지소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는 한국 환상문학은 아직 걸음마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7월에 출간된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김이환 외/황금가지)은 환상문학웹진 <거울> 출신 작가들의 단편소설모음이다. 전체적으로 채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과 애매한 문제의식이 신경쓰이지만 한국에서 환상문학하기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와중에 자기만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배명훈의 <초록연필>이다. 밀턴 프리드먼이 한자루의 연필을 통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분업과 높은 생산성을 은유했듯이, 배명훈 역시 연필이라는 평범한 도구와 그를 둘러싼 일상을 현실과 환상 사이의 긴장을 유지시켜주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사무실을 하나의 생태계로 설정하고 필기구의 흐름을 추적하는 서술은 유쾌하기까지하다. 그러나 뒷심이 약하다. 왜 굳이 비관주의적 반전으로 흘러가야만 했는가. 한마디로 개연성이 부족하다. 이런 개연성부족은 배명훈 뿐만 아니라 단편선의 대부분 작가들이 범한 실수였다.

<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토끼의 아리아 : 맥주의 마음>으로 주목받은 작가 곽재식의 <콘도르 날개>는 미래를 예언하는 영화라는 다소 진부한 소재를 재밌는 입담으로 잘 풀어냈지만, 후반부에서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는다. 이는 판타지소설이나 환상문학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설정을 풀어내야만 서사가 전개되는 특성이 강한 한 피할 수 없는 난관일 것이다. 진산은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에서 이런 난점을 나름 해소해보고자 노력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겠지만, 무협, 판타지 등 장르문학에서 단편이라는 도전은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은림의 <할머니 나무>는 인간의 나무로의 변형과 치매라는 은유를 연관시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다소 평범해도 드라마의 정석(인물의 내적 및 외적 갈등)에 따라 썼다면 차라리 소재의 독특함을 잘 받쳐줄 수 있었겠지만 그와 반대로 가는 듯해서 아쉽다. 언젠가 초록불 님이 말씀하신대로 어떤 알레고리에서 시작되었을 것 같은 이야기가 딱 무엇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백서현의 <윌리엄 준의 보고서>는 톨킨과 영국풍 동화의 이미지를 잘 받아들인 무난한 작품이며, 정소연의 <마산 앞바다>는 동성애 코드를 삽입한 한편, 나나난 키리코의 단편집(<Blue>처럼)이나 우루시바라 유키의 만화 <필라멘트>와 비슷한 우수(憂愁)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 환상문학은 출판시장 뿐만 아니라 장르문학 안에서도 힘겹게 자리잡기에 매진하고 있다. 아직까지 상업적인 성공이 가시화되진 못하고 있어도, <판타스틱> 등을 통한 작품게재와 소수의 팬층확보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톨킨과 르귄, 젤라즈니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이들 작가들이 한국에서 SF/판타지의 뉴웨이브를 일으킬지 어떨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솔직히, 잘 됐으면 좋겠다.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

김이환 외 지음 / 황금가지
나의 점수 : ★★★

환상문학단편이라는 다소 어려운 기획을 훌륭히 해낸 작가들에게 우선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