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 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앞으로 십 킬로 남았군요." "예, 한 삼십 분 후엔 도착할 겁니다." 그들은 농사관계의 시찰원들인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김승옥 선생의 '무진기행(霧津紀行)'이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것은. 사실 내게 무진기행은 좀 불편한 소설이었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혐오 때문만이 아니라, 내겐 어찌된 노릇인지 이 소설이 마치 더러워진 거울이나 뭐나 되는 것처럼 왠지 찝찝했다. 차라리 청춘로맨스 소설이었던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나, 해학의 묘가 배어나오는 박지원의 '허생전' 요약본이 더 좋았다(젊은 느티나무...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 라니... 당시에 이런 오묘한 코드도 교과서에 나오다니 좀 충격이었다-_-;;).
이제와 새삼 무진기행을 다시 찾게 된 이유는 오히려 단순했다. 오랫 동안 물들어 왔던 일본식-구미식 어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단한 욕구가 생겼달까. 나의 소설 작법에 어떤 근본적인 회의가 들어섰던 것이다. 근본적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밑천이 모자라니 크게 바뀔 것도 없었지만, 어쨌든 좀 더 '우리말'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어감이 절실했다. 마침 얼마 전 새로 알게 된 친구에게 그런 고민을 털어놓자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추천해주었다. 그의 글을 따라쓰다보면(보통 이런 걸 '필사'한다고 하지?) 좀 더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나올 거라면서.
대뜸 소설집을 사들고 당장 읽기부터 시작했다. 필사를 위해, 내 글쓰기 공부를 위해 읽어야지 싶어 약간 억지성으로 읽었던 '무진기행'이었으나, 한 문장 한 문장 읽다 보니 어느 새 훌쩍 다 읽어버려서 나는 다음, 또 다음 소설로 손가락을 서둘러 옮기고 있었다.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깊고 구성도 단단했다. 상징과 의미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갔다. 작가가 빈 종이 위에서 거침없이 써내려간 듯한 시원한 기분도 들었다. 소설집 첫 장면을 여는 것은 생명연습(生命演習)으로, 선생의 등단작품이자 다소 습작 같은 느낌을 주는 풋풋한 소설이었다. 그 뒤를 따라 한국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건(乾)이 있었고, 역사(力士),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무진기행, 싸게 사들이기, 차나 한잔, 서울 1964년 겨울, 들놀이,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夜行), 그와 나, 서울의 달빛 0章,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등이 뒤를 이었다.
놀라웠던 건,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무진기행은 불과 24살 대학생 시절(1964년)에 씌여졌다는 사실이다. 그의 전작인 건, 역사,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등이 또 그랬다. 이미 10대 때부터 소설을 써왔고, 한참 소설을 쓰던 때에는 이어령 선생에게도 인정받던 소설가다웠지만 묘한 질투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196,70년대 소설에 대한 나의 오랜 편견-"아이 왜 그러셔요" 체 특유의 문장의 곰살스러움-을 툭툭 깨주는 개그와 위트가 소설 곳곳에서 제법 신나게 살아있었다. 차나 한잔 같은 경우가 그런데, 주인공을 시사만화가로 설정했고 작가 스스로도 만화를 그렸던 경험을 덧붙였는지, 풍자만화가가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대는 꼴을 재치있고 정감있게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문장의 유려함과 치밀함에 있어서는 무진기행이 절정일 것이다. 이른바 '1960년대의 작가' 라 불려지는 김승옥 선생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의 길로 가고 싶어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캐릭터, 구성, 사건 등 소설의 모든 장치가 이야기의 표현에 효과적으로 부합되고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굴지의 대기업 사장의 사위인 주인공이 승진을 앞두고 인사비리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고향인 무진을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 무진기행은, 주인공의 어둡고 침침한 성격과, 사방이 안개로 차 있어 습하고 갑갑한 무진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항상 욕망에 허덕이는 속물들의 군상을 보여주고 있다.
고립과 차단의 공간 무진에서 도리어 드러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저열한 욕심과 허세였다. 음악교사 인숙은 그 이전에는 세무서장인 조에게 매달렸고, 지금은 '서울 사람'인 주인공에게 "절 데려가주시겠어요?" 하며 졸라댄다.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만 볼 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박선생과, 인숙의 태도를 바라보며 속으로 콧방귀를 뀌는 능력주의자 조,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인숙을 내치지도 그녀에게 밀착하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주인공 모두 따지고 보면 속물이었다(그나마 박이 좀 덜하달까). 안개 속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떠오르는 사람들의 욕망은, 누구나 쉬이 살아가고 쉬이 죽어가는 몽환적인 공간 속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나는 방죽의 비탈을 내려갔다. 순경 곁을 지나면서 나는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자살 시쳅니다." 순경은 흥미 없는 말투로 말했다. "누군데요?" "읍내에 있는 술집 여잡니다. 초여름이 되면 반드시 몇 명씩 죽지요." "네에." "저 계집애는 아주 독살스러운 년이어서 안 죽을 줄 알았더니, 저것도 별수 없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네에." 나는 물가로 내려가서 학생들 틈에 끼었다. 시체의 얼굴은 냇물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득, 내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게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금해제의 사이렌이 불고 이 여자는 약을 먹고 그제야 나는 슬며시 잠이 들었던 것만 같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나는 접어든 우산에 묻은 물을 휙휙 뿌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구어체의 자연스러운 대화도 인상적이었다. 소설 또한 현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세계라면, 그 세계의 대화 또한 마땅히 그 공간 속에서 살아숨쉬는 대화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단편 답게 짧고 간결한 분량이지만 무진기행은 기-승-전-결의 정석을 따라가면서 깔끔한 전개를 보여준다. 소설은 주인공이 인숙을 데리러 가기 위한 편지를 쓴 뒤 그것을 몇 번 읽다가 찣어버리고는 도망치듯이 서울로 올라가는 것으로 끝난다. 무진과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남는 작품으로는 무진기행 말고도 중국의 역사(力士, 장사)의 피를 이어받은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재치있게 꺼내는 '역사'와, 다양한 시점에서 한 인간의 변화와 타락을 서술하는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시대를 말하지 않고도 시대의 음울함을 그려내는 '서울 1964년 겨울', 그리고 다소 도덕주의적인 성관념에 입각해서 씌여진 감도 있으나 그 자체로 훌륭한 드라마를 갖고 있는 '서울의 달빛 0章' 등이 있다. 만약 이렇게 쓸 수 있다면... 싶은 욕심마저 나는 작품들이었다.
이렇게 유려하고 치밀한 이야기를 보여주었던 김승옥 선생도 1980년대 들어와서는 스스로 말했듯이 '하느님을 직접 만나' 선교에 온 몸을 던졌다. 당연히 소설은 부차적인 작업이 되었고, 스스로 아쉬워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좀체로 이야기를 써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직도 선생은 '1960년대의 작가'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도 좋았다. 설령 다른 작품들이 다 소각되고 망각되어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무진기행만 남아있어도 이 분은 충분히 축복받은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의 이야기 같은 걸 쓰고 싶어졌다. 김승옥 선생은 확실히 욕심을 나게 만드는 작가다. 물론 흉내만 내서는 안 되고, 그럴 수만도 없지만.
무진기행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나의 점수 : ★★★★
단편구성의 승리.
'1960년대의 작가' 라는 말이 허당이 아님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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