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유르착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를 읽었다. 저자 스스로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로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소비에트 체제가 갑작스럽게 무너졌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납득해버린 동세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소비에트의 다중적인 담론적 실천을 설명하기 위해 꼭 수행성 이론과 들뢰즈/가타리를 끌어와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억압 대 저항, 질서 대 자유, 위선 대 정의라는 '전체주의' 소련 비판을 훌쩍 뛰어넘어 다양한 문화적 실천이 지배적인 담론에 얼마나 크게 의지하며, 그와 동시에 지배적인 담론을 본래의 의도와 달리 내파할 수 있다는 것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사회주의적 가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이를 일상 속에서 갱신하고자 했던 인민의 이야기(보일러실 록커, 단파 라디오 엔지니어, 엑스레이판에 록음악을 녹음하는 애호가, 선전물을 쓰는 동시에 록콘서트를 기획하는 콤소몰 활동가)가 눈길을 끈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힘있게 논의를 펼치는 곳은 후반부에 해당하는 4~7장이다. 여기서 아이러니와 역설은 1960~80년대의 '후기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무엇보다 '썩은 개그의 해석학'이라고 할 만한 <7장 데드 아이러니: 네크로미학, 스툐프, 그리고 아넥도트>는 '공산주의 유머'를 반공주의적으로 읽는 우리의 시선을 교정해준다.
유르착은 페레스트로이카(1985년 이후의 '개혁' 조치)가 인민의 비공식적인 수행적 활동을 공식화해 권위적 담론의 취약함을 그대로 폭로함으로써 원래 의도와 달리 체제를 급속히 붕괴시켰다고 본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이렇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그저 당 지도부의 실수이기만 한 것인가? 페레스트로이카는 '후기 사회주의'의 담론적 실천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유르착의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당 지도부가 아무런 '개혁' 없이 현상유지만 잘했어도 다중적인 소비에트가 좀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과연 그런가? 또한 '체르노빌 전투'를 비롯한 경제적·생태적 위기는 소련의 해체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라는 질문도 떠오른다. (한편 "모든 게 영원할 거라는 완전한 인상"이라는 말에서 뽑아낸 '영원성'이라는 시간 감각은 '소비에트 리얼리즘' 대신 '자본주의 리얼리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소비에트 해체의 공백은 자본주의가 채웠다. 그런데 자본주의 해체의 공백은 무엇이 채울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소비에트가 없으므로 남은 건 공멸뿐인가?) 그러나 이 책의 범위를 넘는 질문은 다른 데서 던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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