퀑탱 메이야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엄태연 옮김, 이학사, 2017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은 『유한성 이후』(정지은 옮김, 도서출판 b, 2010)를 간략하게 보충하는 책처럼 보인다. 메이야수는 흄의 당구공 문제에 대해 포퍼(과학적 사실과 위배되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칸트(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카오스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와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과학이 사라지더라도 인식은 남는다. 당구공에는 물리학적 인과성에 따라 움직일 아무런 필연성이 없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우연성을 인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과학의 재현 가능성을 위배하는 사실은 존재하며, 극단적인 우발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존재를 의식하고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메이야수가 "실제로 이 법칙들이 미래에 변화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데에는 아무런 논리적 모순도 없으며, 법칙들의 항구성에 대한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그 법칙들이 미래에도 영속할 것이라는 추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16~17쪽)고 주장할 때, 그는 은연중에 경제 지표의 예측 불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경제 지표는 미래를 확증하지 못한다.)
한편 메이야수가 과학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에서 '과학 밖 세계에 대한 소설' 또는 '과학 밖 소설'을 발견할 때, '과학 밖 소설'은 마치 비평적 용어처럼 제시된다. 하지만 '과학 밖 소설'은 세계에 대한 과학 없는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사변적 도구일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과학 밖 소설의 가장 근접한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1943)을 들 때 나타난다. 『대재난』은 전기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2052년을 배경으로 이전까지 당연시되던 과학이 사라져버린 세계와 그 안에서 분투하는 인간들을 묘사한다. 오늘날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부를 만한 세계가 펼쳐지고, 주인공은 자신의 고향인 오트프로방스로 돌아가 전원적 삶을 개척한다. 도시문명에 대한 혐오와 전원생활에 대한 이상화는 그 소설이 1940년대 프랑스 괴뢰정부의 반혁명적 공기를 호흡하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소설의 반혁명적 분위기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20년대 극우파 조직인 악시옹 프랑세즈에서 활동한 레옹 도데는 과학을 비방하면서 "우리는 전기電氣 과학은 마치 전기 자체가 그런 것처럼 어떤 지적인 누전에 의해 소멸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90쪽)고 말한다. 이때 메이야수는 프랑스 혁명전쟁과 방데반란이라는 역사적 경험까지 파고들어가지는 않으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가 나치의 침략으로 갑작스럽게 패배했듯이, 누구나 "그럴 리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전혀 다른 일이 발생한다. 여기서 '우연성의 필연성'이라는 메이야수의 토픽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 말하자면 '민주화 이후의 세계'에서는 쿠데타도 고문도 학살도 없을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 (탄핵정국과 기무사의 계엄령 준비가 좋은 예일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무런 확실성도 주어져 있지 않다. 기후변화도 지진도 노심융용도 지금 당장 벌어질 수 있다.(반대로 지금 당장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메이야수는 우리가 오직 우연성만이 확실한, 우연성만이 필연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를 직시해야만 한다고 촉구한다. 절대적 존재자나 이성적 확실성에 의존하지 않은 채 우연적이고 환영적인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는 메이야수의 사변은 근대과학의 파국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중세의 '신이 부재하는 신학'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메이야수는 과학의 무능력을 겨냥하는 듯하지만, 그의 맞수는 자연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적 사회주의자' 또는 '역사유물론자', 바로 마르크스주의자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야말로 '법칙'과 '경향'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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