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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by parallax view 2018. 6. 25.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돌베개, 2018)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제5장.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장도비라 뒤의 사진이다. 각 장들은 그 장에서 해설하는 역사책의 펼침 사진으로 시작하는데, 5장에서 주로 다루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페이지가 비어 있다. 저자 혹은 편집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여러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어 있지만, 저자는 독일어 원전을 읽고 인용했다. 새로운 번역과 독자를 기다리며 비어 있는 책을 펼쳐 놓는다(146쪽)." 그 사진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지만 세계(사)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일종의 세계관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던 이의 마르크스를 향한 감정을 가늠해보게 만든다. 

 

"역사를 비껴간"이라는 장 제목의 구절처럼 유시민은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이 역사를 비껴갔다고 주장한다. 냉전의 역사를 '민주주의 vs. 전체주의'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역사는 이제 종언을 고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는 점에서 그는 통속적인 자유주의자다. 그가 마르크스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역사의 종말』의 저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언급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시간관, 즉 '종말론'의 취약함을 비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유시민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즉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완성이고 인간은 이 완성된 시간 속에서 계속 살리라는 주장 역시 공산주의적 비전만큼이나 근거가 빈약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동시에 후쿠야마가 '역사의 방향'이라는 문제를 제기했고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도 이야기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설정에 '역사의 방향'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되살려 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일관된 방향을 가진 역사를 구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역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169쪽)" 유시민의 통속적인 역사 해석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은 얼마 전에 새로 번역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는 그 책의 「4장. 시간과 진보: 또다시 역사철학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진보progrès가 아니라 과정procès 혹은 과정processus―마르크스는 탁월한 방식으로 이를 변증법적 개념으로 만들어냈다―이었다. 진보는 주어진 것이 아니며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진보는 과정을 구성하는 적대들의 발전에서 비롯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보는 항상 이런 적대들에 상대적이다. 그런데 과정은 (정신주의적인) 도덕적 개념도 아니고 (자연주의적인) 경제적 개념도 아니다. 과정은 논리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이다. 과정은 헤겔을 넘어 모순은 화해 불가능inconciliable하다는 관념으로의 회귀 위에 구축되는 만큼이나 논리적이며, 또한 과정은 자신의 '현실적 조건들', 그러니까 자신의 필연성을 자신의 표면적 반대물, 즉 노동의 영역과 경제적 삶의 영역에서 찾아야 하는 만큼 정치적이다(『마르크스의 철학』 234~235쪽). 

 

거칠게 말해서 마르크스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직선적인 시간관이라기보다는 경향과 반反경향이 격렬하게 대립하며 얽혀 있는 변증법적 시간관이다. 유시민이 말하는 '역사의 방향(진보)'이라는 추상에 대한 마르크스 혹은 발리바르의 대답은 아마도 역사는 매순간 투쟁/대립을 통해 새로 생성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상에 대립하는 것으로 '실제' 내지는 '사실fact'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추상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사실을 통해 추상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다). 그렇지만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시간관이 이렇게 명료하게 나타나지만은 않으며 진보의 도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발흥이라는 '나쁜 방향'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숙제로 남겨져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할 때, 『공산당 선언』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철학으로 부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본』에 이르렀을 때 그는 추상에 대립하는 구체의 세계 속으로, 바로 노동과 계급투쟁의 실제로 파고든다. 바로 여기서 '경향'과 '반경향'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나타난다. 유시민이 『공산당 선언』과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나란히 읽으면서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단계론'을 비판할 때, 『자본』을 회피하며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을 탐색할 때 그가 배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바로 '적대'라는 문제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