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유독 거슬리는 단어가 있었다. 북한 주민. 바로 그거다. 북한 주민.
특히 극우들은 북한 주민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여기에는 북한 정부와 이들을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들어 있을 것이다. 한편, 북한 사람들은 정치적 자기 결정권(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에도 쓰인다. 여기서 더 나가면 북한 사람들은 신민(臣民)이라는 건데, 과연 이런 표현을 곧이 곧대로 쓰는 게 좋은 일인지 의문이 든다.
이미 북한과 남한은 경제력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풍토가 많이 달라졌다. 그냥 달라졌다는 수준이 아니라 후진국 부카니스탄과 중진국 대한민국이라는 구도로 인식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사람들은 단순한 '동포'가 아니라 후진국 교포 수준으로 인식되는 게 아니냐는 거다. 마치 조선족이나 고려인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산가족'을 일상에서 겪는 분들이야 아직은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 외에는...글쎄.
북한 주민이라는 표현의 정 반대편에 북한 민중이 있다. 주로 좌파에서 쓰는 표현이다. 민중이라는 말이 한국에서 갖고 있는 변혁적인 성격을 생각한다면 얼핏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극우의 북한 주민이나 좌파의 북한 민중이나 '해방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두 표현 모두 북한 사람들을 시혜와 구원의 대상으로 타자화시킨다는 문제가 있다. 물론 북한 '민중'이 스스로 독재 권력을 전복하는 시나리오도 상상할 수야 있겠다.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고, 또 발생하면 외부 세력의 개입을 불러오니, 북한 민중이 상황을 얼마나 통제할지 또한 불투명하다는 게 문제지만.
그러면 북한 국민은 어떨까. 이건 또 극우들에게 마뜩찮은 말일 거다. 북한을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또 좌파도 덜 선호하는 표현이다. 사람들을 국민이라는 울타리 안에 묶음으로써 계급 차이를 무시하고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우 공히 쓰이는 표현이 '민족',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인 건데.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소리 같지만, 통일에 대해 그리고 북한에 대해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든 남북이 동포라는 게 여전히 좌우의 합의라는 얘기. 그래서 민족 담론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고, 이 연장선상에 민족주의가 한국에서 의미를 갖는 게 아닐까 싶다. 민족주의가 국민국가와 자유시장의 이념적 토대인 서구와 달리, 한반도에서 조금 더 다른 성격을 띄는 이유다. 민족주의가 제3세계 반(反)식민지 운동의 토대로 작용하던 시기는 이미 지나간 것 같고.
그래서 북한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북한 시민'이라고 부르는 게 어떨까 싶다. 이건 좀 선언적인 의미가 강하다. 시민은 정치적 자기 결정권과 개인의 존엄성을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 민중과는 다르게 집단적이기보다 훨씬 개인(주의)적인 말이기도 하다. 지금 북한의 상황에서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부르는 게 기만은 아닐까, 라는 말도 나올 법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한국 시민, 일본 시민은 있어도 북한 시민, 중국 시민, 러시아 시민은 없는 것 같다. 각 나라의 국가 권력과 어느 정도 독립적이면서도(주로 법률적인 의미보다 정서적인 의미에서) 이들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 말이다.
내 생각에 상대방을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호명하지 않는 이상, 북한 사람들과의 대화나 동아시아 시민의 연대는 성립하기 힘들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시민간 연대라는 허울이 국가간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 말이다. 이 배후에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강력한 국가주의적 경향이 서 있다. 티벳 독립을 둘러싸고 한국 시민과 중국 시민 사이에 대화와 합의가 가능할까? 다오위댜오(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분쟁은? 독도는? 북한 3대 세습 논란에도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가주의적 경향이 정치 논리를 빌어 스며들어 있지는 않은가?
난점도 많고 다분히 선언적이지만, 나는 북한 사람들을 주민이나 민중, 국민으로 부르기보다 시민으로 부르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북한 사람을 엄연히 정치적 책임을 쥔 한 개인으로 마주할 수 있을 때에야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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