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이정환닷컴을 즐겨 읽고 있습니다. 특히 클라우드 소싱 저널리즘에 대한 포스팅(<독자들에게 물어봐라, 클라우드소싱 저널리즘>)은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아침 미디어오늘에 실린 기사 두 개, 특히 "비판 않으면 종북? 경향신문 논리, 조선 닮았다"와 관련해 몇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경향신문의 '진보적 색깔론' 위험하다" (미디어오늘)
"비판 않으면 종북? 경향신문 논리, 조선 닮았다" (미디어오늘)
기자님은 이 기사에서 경향신문의 10월 1일자 사설("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이 조선일보 사설과 무척 닮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9월 30일 조선일보 사설의 "3대 세습과 그 아래 신음하는 북한 동포의 참상을 못 본 체 하는 국내 좌파의 모습은 그들이 좌파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린 무늬뿐인 가짜 좌파, 엉터리 좌파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렸다"는 부분을 인용하셨죠. 이에 대한 기자님의 논평은 이랬습니다.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의 논리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 두 신문 모두 진보라면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해야 한다, 비판하지 않는 것은 곧 북한에 동조하고 북한을 추종하는 것이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민주노동당이 '북한을 무조건 감싸주고 있다'고 규정짓고 '북한을 비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정하고 말았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이정환 기자님의 주장으로는 민주노동당은 단지 북한에 대해 비판하지 않은 잘못 밖에 없습니다. 이에 경향신문이 마치 보안당국이라도 된 것처럼 사상검증에 나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이 지적했듯이, 민주노동당은 3대 세습에 대해 비판을 꺼리기만 한 게 아닙니다. 울산시당은 중앙당이 아니니까 별개라고 볼 수도 있겠죠(어떻게 지역당이 중앙당과 따로 놀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논외로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논평은 어떻습니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3대 세습'을 문제삼는 것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행위인가 아닌가 판단이 필요하다. '3대 세습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평화와 통일을 위한 대화 상대방으로 인정한다면 '3대 세습' 문제는 불편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문제이다."
"불편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란 말입니까. 흥미롭게도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도 경향신문 사설에 대한 반박에서 '현실'이라는 말을 네 번 강조했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문단에서는 "이것이 현실이다."로 맺으면서 비장함마저 자아냅니다.
이정환 기자님과 미디어오늘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경향신문 및 진보 정당들과 진보 인사들의 비판을 조선일보의 그것과 동격으로 보는 듯합니다. 문한별 씨도 미디어스 기고문("민노당이 의심스럽다고? 나는 경향신문이 의심스럽다!")에서 이런 입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데, 솔직히 별로 대꾸할 생각은 안 드네요.
묻고 싶습니다. 이미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북한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입장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든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서든, 3대 세습은 문제제기를 할 만한 사건입니다. 남북 모두 명색이 '공화국' 아닙니까. 다른 나라의 반(反)인권과 반민주를 비판하면서 왜 북한에 대해서는 유독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인권과 민주주의가 국경을 넘어 전지구적인 가치가 된 지금 말입니다(물론 부시 행정부의 미국처럼 '자유와 평화'를 위해 남의 나라를 마구 쳐들어가도 된다는 얘긴 아닙니다.). 하물며 남북 관계는 두 개의 국민국가가 서로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특수 관계입니다. 이런 특수성은 결국 남북이 서로 남이 아니라는 걸 뜻하지 않습니까. 명색이 공당이 대인 관계에 빗대 북한의 세습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게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요?
기자님은 진보 진영 안에서 조선일보 논리가 넘쳐나지는 않은지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진보 진영 안에 국가보안법 법정 논리가 스며들었다는 이정희 대표와 같은 맥락인 듯합니다. 하지만 손호철 교수가 지적했듯이 진보 진영은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침묵함으로써 보수 정당들로 하여금 인권과 반핵이라는 가치를 선점하도록 방기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조선일보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주체가 다릅니다. 비슷한 말이라도 스스로 진보를 책임지겠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현실 권력에 줄을 대며 약자 앞에 강하고 강자 앞에 약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차이를 이정환 기자님과 미디어오늘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수구 언론들이 빼앗은 말을 되찾아와야 할 형편 아닌가요.
이정환 기자님은 지난 5월 인터넷 실명제 컨퍼런스에서 표현의 자유 문제를 두고 설득력 있는 발언을 이끌어 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인터넷 통제가 얼마나 무용한 것인가를 누구보다 절실히 아실 겁니다. 더 나아가 북한 3대 세습을 둘러싼 표현과 사상의 자유 문제 또한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게 아닙니다. 단적인 예로 3대 세습에 대한 북한 주민의 발언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들을 수 있는 '현지의 목소리'라고는 북한 관영 언론에서 보도하는 기사 몇 쪼가리와, 김정일-김정은 부자 사진, 그리고 몇몇 탈북자들의 발언-이마저도 수구 언론의 필요에 의해 선별된-이 전부 아닙니까. 이미 북한에는 인터넷 실명제보다 더한 언론 통제가 진행 중에 있을 것으로 상상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남한의 언론 통제를 비판하면서 왜 북한의 언론 통제는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진보 혹은 좌파가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디어오늘이 민주노동당과 친노 그룹 사이의 연계를 방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를 온전히 믿지는 않지만, 미디어오늘이 계속 북한에 대한 비판을 조선일보 논리나 국가보안법 논리, 역(逆)매카시즘의 일환으로 유도하는 기사를 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분별있고 좋은 기사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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