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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by parallax view 2009. 1. 18.
"약간의 돈은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 소설 <은하영웅전설>의 주인공 양 웬리는 원래의 꿈인 역사학자가 되기 위해 일반대학에 가는 대신, 자유행성동맹군 사관학교에 들어간다. 조국에 대한 투철한 애국심 때문에? 천만에. 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막대한 빚이 그의 등을 사관학교로 떠민 것이다. 장사꾼 기질이라곤 개미눈꼽 만큼도 없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들려준 말은 양 웬리로 하여금 돈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재밌는 건 대부분 돈을 사랑하지만, 돈을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이해하기 위해, 경제가 급속히 나빠진 IMF 구제금융 이래로 수많은 경제/경영 관련서적이 서가의 베스트 TOP10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젠 자기개발서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또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경제적으로 효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돈에 대한 이해보다도 더욱 떨어지는 것은 경제학에 대한 이해도이다. 이건 사람들의 지성이 문제가 아니라, 편견과 두려움의 문제다. 경제학은 어쩌다 이렇게 어려운 학문이 된 것일까?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후생경제학, 통계학, 화폐금융론, 파생금융상품론, 조세론 등 듣기만 해도 어질어질한 이 영역들이 좀 배웠다 싶은 인문·사회과학도마저 좌절시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니, 누구 때문일까?

토드 부크홀츠는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김영사, 2005 신간)에서 그 탓(?)을 경제학의 위대한 학자들에게 돌리고 있다. 존경스러운 대가('한계효용학파'의 거두 알프레드 마셜 등)를 제외하고는 비꼬고 까고 가십까지 동원해 웃음거리로 만든다. 일단 경제학의 아빠인 애덤 스미스부터 여지없이 까인다. 그는 수줍고 여성스러운 성격이었으며, 자다가 몽유병 환자마냥 파자마 차림으로 돌아다니다 동네 망신을 당했다. 6장 '격분한 현자 칼 마르크스'편에서는 법학도인 청년 맑스가 술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그의 학문을 직접 활용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고 한다.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그러나 부크홀츠의 목적은 위대한 경제학자들을 코미디언으로 만드는 데에 있지 않다. 경제학의 주요 이론이 누구에게서 시작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유효한지를 검토하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89년 이래로 미국을 비롯해 학부 단위의 강의에서 교재로 쓰였고, 지금은 필수교양서쯤 되었다. 아쉽게도 완전히 교양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이 책은 좋든 싫든 어느 정도 경제학은 알아야 읽을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경제학원론 정도의 수준이면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애덤 스미스부터 시작해서 '비교우위론'의 데이비드 리카도, '인구론'의 맬서스, 고전학파를 정리한 존 스튜어트 밀, '자본론'의 칼 맑스 등 고전학파 경제학자들과, 알프레드 마셜, 케인즈,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현대 경제학의 굵직한 인물들을 죽 훑어나간다. 1989년 출간임을 고려할 때 공공선택학파(1)합리적 기대이론(2)과 같은 비교적 최신경향도 소개했다. 경제학원론을 공부하는 입장이라면 10장 '케인즈 학파와 통화주의자들의 대결' 같은 화폐유통속도의 안정성 논쟁(3)이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냉전말기의 흔적 때문이겠지만, 칼 맑스에 대한 서술은 해학을 넘어 지나치게 악의적이다. 한 마디로 맑스의 '자본론'은 경제학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억압적인 소비에트 체제를 만들어낸 해악만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를 '개의 등에 달라붙은 벼룩'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애초부터 맑스에 대한 진지한 검토는 안중에도 없었단 얘기다. 

여러 경제학자들을 소개하는 듯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1883 ~ 1946). 당대에도 '이단아'로 불려졌고, 괴팍한 엘리트주의자에 까다로운 탐미주의자, 바이섹슈얼이었던 케인즈는 이 책의 중반 이후부터 자신의 위용을 과시한다. 책은 현대 주류경제학에서 케인즈가 차지하는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사실은 노벨상이 아닌, '노벨 기념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과, 그와 블로그에서 생산적 논쟁을 벌이는 그레고리 맨큐(<맨큐의 경제학>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사람) 모두 대표적인 케인즈주의자들이라는 데서 그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정부지출을 늘려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로다! 이 단순한 선언에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매료되었고 그 이상의 맹비난이 이어졌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말한대로, 케인즈의 등장 이래로 "우리 모두는 케인즈주의자가 되었다." 좋든 싫든.

"여하한 지적 영향도 받고 있지 않다고 믿는 실질적 인간도 사실은 이미 죽은 어느 경제학자의 노예이기 일쑤이다." 신랄한 표현을 즐겨 사용한 케인즈다운 코멘트대로, 현대 경제학은 여러 대가들의 아이디어 노트에 다름 아니다. 더 이상 순수한 고전학파도, 순수한 케인즈주의자도, 순수한 통화주의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단순히 케인즈주의적 처방만으로는 현재의 자본주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 여기에 현대 경제학의 난점이 있다.

경제학자 대부분은 절충주의를 따르고, 무엇보다 균형을 선호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현상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조망하며, 좋다 나쁘다를 뚜렷이 말하기를 꺼린다(한미FTA에 대한 학계의 평가를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이 점이 경제학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이 책은 글쓴이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영미의 주류 경제학만을 대상으로 한다. 최근 자본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고 있는 칼 폴라니(4) 등은 제외되어 있다. 몇 가지 편견을 상쇄할만큼 충분히 재미있고 쉽게 쓰였지만, 첫 출간 뒤 20년이 지났다는 것과, 시대가 새로운 경제학 패러다임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슬슬 이 책을 낡은 것으로 만들고 있는 듯하다. 어떤 현상도 한 세대(30년)가 지나면 역사가 된다는데, 이제는 이 책을 역사의 반열에 넣어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해학적이면서도 좀 더 폭넓게 경제학사를 조망하는 그런 책을 기대해 본다.


(1) 공공선택학파 : 제임스 뷰캐넌을 비롯한 미국 시카고 학파의 경제학 경향. 정치를 비즈니스로 규정, 관료사회가 어떻게 시장의 정보를 왜곡하고 로비스트 및 기업가와 결탁하는지에 주목한다. 이들은 통화주의자와 함께 케인즈의 국가주도 경제계획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자들이다.

(2) 합리적 기대이론 : 로버트 루카스와 같은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경제이론. 모든 행위자들은 합리적이고, 시장에서 발표된 정보에 즉각 반응하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 없이 시장실패를 극복한다고 주장한다. 주로 거시경제 분야보다 금융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론이다. 이를 비판하는 경향으로 로렌스 서머스(미 국가경제위원장) 등의 행태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 있다.

(3) 화폐유통속도의 안정성 논쟁 : 화폐수량방정식 MV=PY (M : 통화량, V : 화폐유통속도, P : 물가, Y : 총산출량)에서 통화주의자들은 V가 일정하기 때문에 통화량만 조절하면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케인즈주의자들은 V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통화량 뿐만 아니라 정부주도의 경제부양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이 학계의 주류가 되었던 시기에 자신들의 해석에 반대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4) 칼 폴라니(1886 ~ 1964) : 헝가리 태생의 경제학자. 청년시절에 게오르그 루카치 등과 교유하고 기독교 사회주의를 지지하였다.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 1944)으로 경제학을 역사적·인류학적 관점과 접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경제관은 시장이 사회와 맺는 관계에 주목하여, 사회로부터 독립된 시장이 아니라 사회에 천착한 시장 개념을 제시하는 등 주류 경제학에서 많이 이탈해 있다(Heterodox). 우리나라에서는 우석훈 등의 소장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지음, 이승환 옮김 / 김영사
나의 점수 : ★★★

대표적인 경제학 입문서. 그러나 웃음에 휘말리지 않는 균형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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