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십니까? 이 영화는 이게 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영화를 몹시 폄하하는 글이 되겠지만, 친구 댕구리의 말을 빌리면 '관객을 내내 달리게 만드는' 이 영화의 성깔을 이 장면만큼 잘 보여주는 씬은 없을 것이다. 영화는 정말 내내 달린다. 뛰고, 뛰고 또 뛴다. 내 '아가씨' 즉 내 '돈' 뺏아가는 놈 잡으러, 내 '아가씨' 찾으러, 지영민이가 사람 죽였다는 증거 잡으러. 힘들여 뛰고 팀 나눠서 뛰고 지쳐도 뛰고 죽을 거 같아도 뛰는 장면의 연속에서 이 영화의 시작점은 '살인의 추억' 추격씬 그 하나 뿐이지 않았을까 싶다.
긴장의 완급조절이 없는 건 아니다. 상당히 잘 계산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쉬면서도 영화는 독촉한다. "힘들어? 근데 저기 저 새끼 보이지? 저 잡아죽일 놈, 정으로 대가리 내리찍어도 시원찮을 놈, 저 놈 보니까 쉴만해? 어때, 돌아갈까, 그냥 뛸까?" 쉬어도 쉬는 거 같지가 않다.
영화의 베이스는 어둠과 어둠의 대결이다. 보도방 주인 엄중호(김윤석)는, 물론 속물에 마초이고 꼰대다. 이기주의자다. 그는 도시의 어둠에서 암약하는 군상 중 하나다. 그런 그가 더 거대한 어둠과 맞선다. 한 개인의 완전한 광기, 같이 영화를 본 친구 N은 연쇄살인마 지영민(하정우)을 싸이코패스로 규정지었는데, 어쨌든 이 어둠은 어둠이 아니고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게 영화의 스토리다. 도시라는 거대한 정글 속에서, 정글의 높은 언덕인 망원동을 배경으로, 살인의 현장인 가정집은 거대한 성채이자 광기의 전당이다. 그 어둠을 정말 잘 살렸지만, 어떤 관객들은 이 '어둠'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엄중호와 지영민의 대결을 '괴수와 괴수의 대결'로 보았던 것 같다. 엄중호는 개마초꼰대긴 해도 인간이다. 그는 살인욕망으로 가득찬 괴수와 싸우더라도 한 손으로는 망치를, 남은 손으로는 비록 썩어가긴 해도 그래도 인간으로서 쥘 수 있는 마지막 동앗줄 하나 움켜쥐고 있다. 즉, 이들의 싸움은 '고지라와 가메라의 결투'가 아니란 거다. 그래도 인간이 괴수를 잡아야 되지 않느냔 거다.
그래서인지 엄중호보다 지영민의 어둠이 더욱 깊다. 상황마다 하정우 눈 굴리는 걸 보라. 매 순간순간 섬찟하다. 순간마다 느낌이 다르다. 대신 살냄새 나는 엄중호는 순식간에 가슴을 서늘하게는 못하지만 그 끈질김, 악받침 하나만으로 관객의 손을 움켜쥐고 같이 뛰도록 만든다. 하지만 경찰의 무능력을 과도하게 묘사한 건 무리수가 아니었을까? 도대체 여형사(박효주)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리고 액션은 이제 '올드보이' 이래로 한국 장르영화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살냄새 나고 빈틈 많아 보이는 리얼액션' 합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 기원을 대체 어디서 잡아야할까? 그런 액션이 아니면 '리얼함'을 살릴 수 없다는 인식은 속칭 '웰메이드' 감독들의 공유재산이 되어버린 걸까? 물론 꽤 어울렸지만 말이다.
'추격자'는 남자영화다. 두 남자의 대결. 승부가 분명한 싸움. 그 누구도 엄중호가 지영민에게 패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란다. 친구 N과 포장마차에서 영화를 안주삼아 술 한 잔 하고 난 후, 신림동의 으슥한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그 어둠, 그 골목 사이사이를 경계하면서. 흠칫흠칫 뒤를 돌아보면서. 영화의 여운은 그런 식으로 일상에 남는 법이다.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덧 : 근데 서영희 씨, 모바일 화보집은 대체 왜 찍으셨나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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