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이처럼 다른 식물뿐 아니라 다른 종들과도 교류한다면 식물의 몸 안에서도 ‘생각’이 이루어지는 복잡한 과정과 비슷한 방식으로 어떠한 소통이 일어날 거라고 추측하는 것이 과연 지나친 상상일까?” (63쪽)
파코 칼보의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하인해 옮김, 휴머니스트, 2025)는 식물에도 지능이 있을 수 있으며, 지능 또는 지성이 생물의 위계서열을 결정하는 자리에 놓일 수 없음을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주장하는 책이다. ‘식물지능’이라고 하면 어쩐지 사이비 같다는 인상을 받기 쉬운데, 지은이는 최대한 과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다시 말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재현하며 논문을 쓰고 토론에 참여함으로써) 검증의 기나긴 길을 감당하려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책은 “1부. 지능의 관점으로 다시 보는 식물”, “2부. 과학으로 보는 식물지능”, “3부. 식물지능이 펼치는 미래”의 세 가지 파트로 나뉜다. 1부에서는 동물은 빠르게 움직이지만 식물은 느리게 움직인다는 것 때문에, 또 식물의 움직임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일 뿐 목적 지향적인 지능적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기존의 관점 때문에 우리가 ‘식물맹’ 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식물에 지능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하나씩 풀어준다. 놀랍게도 지은이는 식물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식물의 생리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까지(!)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식물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마음[mind]은 인지과학의 [어쩌면] 영원한 숙제로 알고 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식물지능을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학문이 태어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윤리적 문제도 나타나며(“인간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쾌고감수성을 지닌 존재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용해도 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식물까지 연결할 때, 기존의 생활방식 전체를 조정해야 할 수 있다), 인간이 우주라는 전혀 다른 환경을 탐색하는 방식에도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제안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식물지능의 존재 여부를 탐색하는 책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국제식물신경생물학연구소 소장 스테파노 만쿠소의 책이 꽤 여러 권 번역된 상태다(<식물을 미치도록 사랑한 남자>, <매혹하는 식물의 뇌>, <식물 혁명>,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식물, 국가를 선언하다>). 나는 만쿠소의 책들을 깊이 살피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식물지능에 대한 책들이 너무 선언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그래, 식물에 지능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뭐?”).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도 만쿠소의 책들과 큰 흐름에서 함께할 테지만(지은이 파코 칼보는 식물신호전달및행동철학연구소 민트[MINT]의 소장이자 만쿠소의 동료이기도 하다), 나는 식물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통해 식물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그럼으로써 지능의 정의와 범주 자체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지점에서 감동을 받았다.
내 감동 포인트: 식물이 단독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과 늘 상호작용을 하고 자신과 관계 맺는 모든 존재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식물의 지능은 큰 범주의 지능에 속할 수 있지만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지능과 ‘다른 지능’이라는 주장. 무엇보다 지능은 개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관계에서 잠시 ‘점유’하거나 (과감하게 말하자면) ‘빌려온’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의 여지.
“이는 링컨 타이즈가 경고한 “데이터의 과잉 해석, 목적론, 의인화, 철학화, 억측”의 위험을 피할 유일무이한 방법으로 보인다. 행동이 펼쳐지는 자연환경에 초점을 맞춘다면 인지는 식물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지는 유기체와 그 주변 환경 간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무언가에 가깝다. 유기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가 아니라 유기체가 주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야 하는 까닭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경험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233쪽)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원제 “플란타 사피엔스(Planta Sapiens)”도, 한국어판의 제목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와 부제 “식물에서 발견한 새로운 지능의 미래”도 각각 이 책의 핵심을 콕 집어준다. 식물의 지능을 인간의 기준으로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그러니까 의인화와 ‘동물중심주의’ 모두 벗어나야 한다는 것). 식물을 통해 지능의 범주 자체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지능에 대한 인식의 지평 전체가 바뀔 수 있다는 것. 책 한 권에 담기엔 너무 광대해 보이는 주제지만, 지은이가 하나씩 두들겨가며 놓아둔 돌다리를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어느새 설득될 것이다.
나는 글을 쓰는 동안 (정확하게는 글이 잘 안 쓰이는 동안) 거실에 놓인 식물을 바라봤다. 몬스테라며 고사리과 식물들이 화분에 담긴 채 조명에서 나오는 빛을 쬔다. 내가 이들을 감각하는 것만큼이나 이들 또한 나를 감각하고 있다. 지능 있는 존재가 누군가를 해칠 것이라는 생각은 <프랑켄슈타인>보다 오래되었을 테지만,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나와 (아주 큰 범주로 넓혀야겠지만) 같은 계통수의 존재들이 굳이 나를 해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물부터 잘 주자. 언제나 닝겐이 문제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해온 존재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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