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재훈 옮김, 휴머니스트, 2024)은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 철학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막상 읽어보니 명성에 비해 너무나 소박한 ‘에세이’라는 점이, 또한 ‘생각나는 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명제가 무척 단순 명쾌하게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새삼 흥미로웠다.
《방법서설》은 1637년 익명으로 출간된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서문으로 쓰였다. 즉 일종의 방법론 소개인 셈으로, 데카르트가 자신의 연구 방향을 독자들에게 나름 친근하게(현대의 우리말 독자들에게는 해설이 없다면 충격과 공포이지만.) 설명하려고 프랑스어로 쓴 글이다. 책을 읽다 보면 원제에 해당하는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서설”(휴머니스트판은 원제 전체를 제목으로 삼았다.)이 “내가 공부하는 법” 또는 “나처럼 공부하면 이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로 보여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특히 지나치게 겸손 떠는 이런 문구를 읽고 있자니 종교전쟁 시대의, 그리고 교권이 아직 강력했던 시대의 자기 방어술로 보여서 쓴웃음도 나왔다. “이처럼 나의 계획은 이성을 잘 인도하려고 각자가 따라야만 하는 방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이성을 인도하려고 내가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19쪽).”
이 책에서 이재훈 국립창원대 철학과 교수가 해석하는 데카르트는 몽테뉴의 《에세》의 독자, 르네상스 인문주의 전통의 계승자다. 데카르트는 스콜라철학자들의 책에서 진리를 찾아 헤매다 몽테뉴를 따라 ‘세계라는 책’을 여행하기로 결심했고, 세계라는 책 속 여행의 끝에서 ‘나라는 책’을 여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재설정한다. 이 판본에서 눈길이 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데카르트의 시대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또는 이행기로 규정하고 단절에 집중하는 방식이 아니라, 데카르트 사유의 연속성을 당대의 휴머니티(humanity) 탐구라는 관점에서 살핀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끝날 줄 모르는 혼란 속에서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탐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과연 종교전쟁 시대의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본인이 수학에 능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논리학과 기하학, 대수학조차 진리 탐구의 전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현학적이고 동어반복적인 수학이 아니라 ‘생각하는 나’, 내가 스스로 관찰할 수 있고 통찰할 수 있는 범위 안의 내가 진리의 출발이라고 선언한다. 그 어떤 지적 권위가 아니라 나로부터 사고를 시작한다는 이 단순한 명제가 많은 것(이른바 ‘문명’이든 파괴든 또는 이 둘의 변증법이든)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 중요하다(데카르트의 사유는 당대 철학자들의 문예공화국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김호경 옮김, 글항아리, 2014]에서, 스피노자 또한 데카르트의 독자로서 여러 데카르트 주석서를 쓰고 편지를 통해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고 서술된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데카르트가 의사 또는 생리학자로서 심장의 운동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생명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과 (지금의 관점으로는) 종 차별적 시선을 드러내는 대목으로 악명 높지만, 데카르트를 현대적인 시각(철학이 사유 일반에 관한 활동이 아니라 분과 학문 체계에 편입된 종목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의 ‘철학자’가 아니라 전일론적인 자연철학자로 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눈길이 갔다. 이에 대해서는 홍성욱의 글을 참고할 만하다. 〈생리학자 데카르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7920&cid=58939&categoryId=58951
옮긴이 이재훈 교수의 주석과 해설이 있었기에 데카르트에 대한 편견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에게 근대주의의 폐해를 전적으로 돌리는 시각 같은 것. ‘생각하는 나’는 많은 질문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생산도 파괴도 일어났지만, 데카르트가 인간의 절대성을 부각하고 주장했다는 식의 해설로부터는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준다(데카르트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다분히 스토아철학적인 부분도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만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중에는 신체와 정신의 양생도 포함된다는 식의 접근을 말한다).
한편 옮긴이는 오늘날 철학의 기본 전제가 된 듯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기술(techne)을 강조하는 철학적 경향을 신학적 절대주의의 세속화된 버전으로서 ‘기술적 절대주의’로, 기술적 절대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을 “니체와 하이데거 그리고 이들의 에피고넨(epigonen)들(184쪽 각주 19번)”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니체와 하이데거의 에피고넨에는 프리드리히 키틀러 이후의 매체학자, 브뤼노 라투르를 비롯한 행위자연결망이론(ANT) 연구자, 이른바 ‘신유물론’으로 느슨하게 묶이는 이론적 담론의 제안자(마누엘 데란다, 제인 베넷 등)를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중심주의를 보다 면밀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휴머니티 탐구를 옹호하는 새로운 《방법서설》을 살펴볼 가치는 충분할 것 같다. 데카르트는 여전히 간단하게 기각할 수 있는 철학자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