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젊은것들

1.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말, 말, 말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중 어느 쪽이 진리인지 판별할 수도 없을 것이며, 사실 그보다는 본질적으로 '진리' 따위가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고로 이 책을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고 감동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감동할 요소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정처 없는 수다들만 난무할 뿐이다. 이 책은 지침서도, 교본도, 문학 작품도, 사회과학 서적도,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책은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이 책이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삶을 살아가는 데 조금의 기여 정도는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p.15-16)

이 문단이야말로 <요새 젊은것들>이 담고 있는 유일한 '진실'인지도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20대 혹은 '88만원세대'의 성공담이 아니다. 기성세대들(특히 386들)에게 '청춘의 선물'로 미화되곤 하는 실패담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미화하지 않는 것. 혹은 미화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쿨함'의 마지노선인지도 모른다.

2. <요새 젊은것들>(단편선, 전아름, 박연 / 도서출판 자리, 2010)은 대체로 20대 독자에게 친화적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유의 책에서 아쉬운 점은, 많은 독자들의 감상이 "아, 그냥 이런 애들이 있군"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혹은 "얘넨 엄친아(아니면 명문대)잖아" 에서 별반 나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인터뷰어들이 제법 핫한 사람들(한윤형, 김지윤, 김사과 등)을 집어넣은 것은 이들이 직관적으로 떠올랐기 때문만 아니라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한 것 같다. '평범한' 20대를 인터뷰하기가 그닥 쉬운 것도 아니다. 무엇을 '평범하다'고 규정할 수 있을까? 물론 '남들 하는 대로 사는' 친구들을 찾으면 될지도 모른다. 적당히 스펙쌓고 인맥쌓고 대기업 취직하고 결혼하는, 뭐, 그런 생활. 아니면 눈가에 검은 줄 긋고 변조된 목소리로 "저는 학자금 대출이 2천만원이 넘었어요" 하며 한탄하는 예비(혹은 실질) 비정규직 20대 얘기를 하거나.

그럴 경우, 이야기는 빤하다. 스펙의 무한경쟁으로 들어가나, 대출의 무한한 덫으로 들어가나 고통의 수렁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에서(물론 소득의 실질적인 차이와 계급상승에 대한 욕망까지 싸그리 무시한다는 건 아니다.). 그 점에서는 여기 소개된 20대들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일반인의 레일에서 벗어나 있기에 더 불안해한다. 만약 그 불안을 읽지 못한다면, 혹은 상상하지 못한다면 이 책을 읽는 의미는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요새 젊은것들>은 일종의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잘난, '핫한' 20대의 이야기를 미화하지 않고 '쿨하게' 뽑아내야 한다는 딜레마. 그 딜레마를 극복하기보다 그냥 안고 가는 것이 이 책의 미덕 아닐까. 의도적으로 살린 속어나, 종종 늘어지는 도입부는 애교로 봐줘도 좋겠다(덧붙여, 인물소개 페이지에 스케치와 사진이 같이 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인터뷰집이고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은 만큼, 굳이 서평이랄 게 필요없는 책이긴 하다. 다만 책 속 인터뷰이들을 한 두 팀 정도 만난 적이 있기에 각 인터뷰에 대한 인상과 함께, 인터뷰이에 대한 약간의 '아는 척'(그리고 고백?)을 곁들여 보는 것도 좋겠다.

1. 한윤형 : 한윤형 인터뷰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와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털어놓자면, 나는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도, <뉴라이트 사용후기>도 아직 읽지 않았다(<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를 서점에서 대충 훑어본 걸 읽었다고 치진 않겠다.). 사실 강준만이나 진중권 같은 안티조선 운동 스타들의 명성 말고는 그 쪽 담론사에 대해 전혀 몰랐다. 2008년 그를 처음 알았을 때도 좀 무덤덤했다. 지금은 어떠냐면, 나는 그가 '20대 논객'이라는 정글도를 들고 밀림을 헤쳐가는 모습을 조금은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인터뷰에서도 줄곧 지적되는 '서울대'라는 사회자본도 그렇지만, 그가 가장 주목받는 20대 필자라는 것은 그를 옭아매는 족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비치는 한윤형은 그것을 기꺼이 지고 가면서도 부모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가볍지 않아 보인다. 그의 건투를 빈다면, 역시 책을 사는 게 맞다.

2. 곰사장 : 인터뷰어들이 붕가붕가레코드의 곰사장(고건혁)을 인터뷰하기 딱 3일 전에, 문화매거진 <오늘> 2010년 1-2월호 기사 때문에 곰사장을 만났다. 그 땐 <요새 젊은것들> 팀이 있는 줄 몰랐다. 글에서도 언급되었던 카페 벨로주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솔직히 나는 그 날 인터뷰 망했다고 생각했다. 방법론의 문제라던가 페이지 제한 같은 건 접어두고 말이다. 제법 괜찮은 이야기를 뽑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수첩을 확인했을 때의 낭패감으로 기사 쓰는 것을 자꾸 미루기도 했다. 그래서 인터뷰어 박연의 글을 보며 낭패감을 한 번 더 느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다만 박연의 인터뷰는 아무리 사전설명을 했어도 독자가 홍대 인디 씬을 어느 정도 알거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을 한 번쯤 훑어봤어야 따라갈 수 있지 않나 싶다.

3. 김지윤 : '고대녀'로 알려진 '다함께' 활동가 김지윤. '운동권 그녀'를 미워하거나 싫어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녀의 개인적인 고민과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반가웠다. 운동권도 사람 아닌가 말이다. 다만 중반에 "운동에서 자발성 만큼 중요한 게 '지도'"라고 이야기할 때와('민주집중제'?) '볼리바르 혁명' 이야기할 때는 맥이 빠지기도 했다. 그것이 그녀의 신념이니까 별 수 없는 것이겠지만, 동의할 수 없는 것이므로.

4. 박가분 : '철타쿠'(철학 오타쿠)로 불리는 박가분을 알게 된 것은 한 동안 환상문학웹진 거울(<타워>의 작가 배명훈 등이 활동 중)을 기웃거릴 때였다. 그는 거울 비소설 부문에 서평을 썼고,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 팀 ILN에서 활동했다. 잠깐 그가 활동 중인 다음카페 비평고원에서도 그가 쓴 글의 조각을 조금 읽어보았다. 가라타니 고진과 슬라보예 지젝이 종종 동원되는 글들은,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불편하고 상당히 관념적이다. 일종의 지적 지도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지만, 종종 그에게 무엇을 위한 논쟁인지를 묻고 싶은 글들이었다. 인터뷰에서도 관념성이 슬금슬금 피어오르는데, 의도했든 안 했든 박가분의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한 인터뷰 전략은 그의 관념성을 완화시킨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나는 박가분의 '군대 이후'가 궁금하다(그는 현재 공무수행 중이라고 한다.).

5. 김사과 : 나는 김사과를 모른다. 그녀의 단편 <영이>도, 장편 <미나>와 <풀이 눕는다>도 읽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쏟아내는 자존감과 냉소-그런데 그게 김사과만의 개성일까? 오롯이 자기 안에서만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풍기는 어둠의 '포스'라고 해야 할까?-만은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386 꼰대들에 대한 평가-"그러니까 사실은 그냥 기성세대인 거예요"-보다 김사과 자신의 소설취향에 대한 이야기-"저는 원숙한 것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제 감수성으로 이해가 안 되는 글이 되어버렸어요"-가 더 눈길이 간다. 그게 도리어 김사과의 '나이'(즉, 시간과 함께 변해갈 김사과)를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6. 장석종 : 김사과와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기 전까진 패션무가지 <크래커>도, 편집장의 존재도 몰랐다. 다음에 잠깐 이야기할 '좋아서 하는 밴드'도 그렇듯이 <크래커> 편집장 장석종의 고민은 '생존'이다. 그건 곰사장도 그렇고, 한윤형도 그렇다. 장석종의 고민은 좋아하는 걸 하면서 먹고 살기. 그리고 그걸 유지하는 방법은 수입을 팀원 모두 공평하게 나누기. 저자들도 서문에서 이야기했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이름이야 어떻게 붙이든) 더 사회주의 지향(?)으로 보인다는 게 재밌다.

7. 박용준 : 부산의 인디고 서원은 "서울이 중심"이라는 사고에 반기를 드는 배움의 자율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다(<오늘> 2009년 5-6월호 : 내 삶에 들어온 인문학(3)). 이곳의 또 다른 키워드는 '청소년'. 인디고 서원의 아이들은 수동적인 입시교육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는 걸 넘어, 온갖 경계를 넘나드는 배움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그 흔적이 세계 석학들과의 대화기록인 <정세청세>일 게다.). 인디고 서원의 박용준에게 허아람 선생과의 만남과 인디고 서원은 인생 그 자체인 것만 같다(한편, 그의 혁명론(?)은 폭이 너무 넓다는 인상이다.). 지역을 보면 숨어있는 청소년공동체가 은근히 존재하는데, 나는 박용준 인터뷰를 보면서 청소년문화공동체 품이 생각났다(<오늘> 2009년 11-12월호 : 딴짓 하는 삶, 적령기는 없다! 19세). 이곳의 아이들도 입 모아 말하는 건, 자기 인생에서 이런 공동체를 만났다는 거 자체가 행운이었다는 이야기.

8. 좋아서 하는 밴드 : 생계형 거리공연밴드, 좋아서 하는 밴드. 이들은 사실 좋아서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다는 걸 알기에, 쉽게 들뜨거나 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음악작업 또한 일상적이며 반복적인 연습 결과라는 걸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의 두 발이 땅에 닿아있다는 점이 참 다행스럽다.


좋아서 하는 밴드, <신문배달>

9. 반이다 : 작년 9월에 연세대에서 반이다의 다큐 <개開청춘> 공동체 상영회를 했을 때(Hendrix, <20대가 만든 20대 다큐멘터리 영화 '개청춘' 상영회>), 나도 갔다. 책을 보니 인터뷰어 단편선 역시 와 있었더랬다(생각해보니 공교롭긴 하다.). 당시 나는 PD저널에 짧게나마 영화칼럼을 기고하고 있었고, 술자리에서 나는 반이다 사람들에게 <개청춘>에 대해 리뷰를 쓰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면이 사라져 그 말은 허언이 되고 말았다. 반이다 사람들은, 내가 받은 인상은 꽤 수더분하고 솔직하다는 것이다. <개청춘>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나 통찰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영화는 계속 질문을 던질 뿐이다. "취업을 해도, 과연 너, 나는 행복할까?" 작가들이 '신자유주의' 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건, 그리고 민희와 인식이 작품을 통해서, 또, 작품과 함께 변해가는 모습을 포착한 건 다시 생각해도 적절하다. 반이다의 다음 작품은 무엇이 될까.

인상비평을 넘어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 너무 산만하게 삽입된 것 같다. 그럼에도 이것이 <요새 젊은것들>이 내게 주는 의미다. 기억을 환기하고 그걸 온·오프라인으로 연결시켜보는 것. 결과적으로 이 글은 서평이 아니라 <요새 젊은것들>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보론이 되었다. 다른 독자들에겐, 특히 20대 또래들에겐 이 책이 어떻게 다가올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핫해 보이는 사람들도 당신과 똑같이, 사는 게 후덜덜하다고. 그러니까 일단 한 번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