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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6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알렉세이 유르착의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를 읽었다. 저자 스스로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로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소비에트 체제가 갑작스럽게 무너졌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납득해버린 동세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소비에트의 다중적인 담론적 실천을 설명하기 위해 꼭 수행성 이론과 들뢰즈/가타리를 끌어와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억압 대 저항, 질서 대 자유, 위선 대 정의라는 '전체주의' 소련 비판을 훌쩍 뛰어넘어 다양한 문화적 실천이 지배적인 담론에 얼마나 크게 의지하며, 그와 동시에 지배적인 담론을 본래의 의도와 달리 내파할 수 있다는 것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사회주의적 가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이를 일상 속에서 갱.. 2019. 10. 27.
기록시스템 1800·1900의 출간 소식을 듣고 오래도록 기다린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기록시스템 1800·1900』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를 읽었을 때 느꼈던 충격이, 『기록시스템 1800·1900』을 읽었을 때 더욱 가중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816쪽에 43,000원(온라인 서점 38,700원)이라는 가격이 주는 무게감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 정도 분량과 값을 감당할 만한 책이다. 역자도 『광학적 미디어』를 번역한 윤원화 선생님이라 믿음이 간다. ============================================================================ Ⅰ. 1800 학자의 비극, 무대의 서막 독일 시문학Dichtung은 한숨과 함께 시작한다. 아아! 이제껏 철학, 법학과 의학.. 2015. 12. 27.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7, 문학동네)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오타쿠를 포스트모던한 존재로서 그려 낸다. 그의 구상은 일찌감치 문화연구 분야에 잘 알려졌고, 이미 익숙해진 것이기도 하다. 때늦긴 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직접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아즈마는 프랑스의 헤겔 연구자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펼친, 근대의 인간이 마주한 자화상으로서 '동물화'와 '스노비즘'의 이분법을 재해석한다. 코제브는 2차 대전 이후의 미국에서 만연한 소비주의를 통해 욕구의 충족이 최상의 덕이 된 인간을 자기반성이 없는 '동물'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일본인을 세계에 대한 냉소를 품으면서도 무의미한 부정을 통해 이 세계가 지탱하는 데 협력하는 속물로 보고 앞으로 세계는 이들의 '스노비즘'이 일반화될.. 2015. 11. 9.
놀이와 인간 『놀이와 인간』(1994, 문예출판사)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을 읽었다. 카이와는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놀이(게임)에 대한 문화연구/비평을 수행한다. 그는 호이징하가 문화의 모태로서 놀이를 주목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경쟁과 흉내(모의)만을 놀이의 형식으로 보고 운과 흥분(현기증)을 배제했다는 점에서 불충분했다고 지적한다. 카이와 스스로 말하듯 '놀이를 출발점으로 하는 사회학을 위하여' 놀이의 성격을 네 가지로 구분하고 이를 통해 문명 일반을 해석하려 한다. 경쟁(아곤agon), 운(알레아alea), 모의(미미크리mimicry), 현기증(일링크스ilinx)의 2x2 조합 중 가능하고 지배적인 조합은 경쟁-운의 쌍과 모의-현기증의 쌍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그.. 2015.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