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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기록시스템 1800·1900의 출간 소식을 듣고

by parallax view 2015. 12. 27.

오래도록 기다린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기록시스템 1800·1900』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를 읽었을 때 느꼈던 충격이, 『기록시스템 1800·1900』을 읽었을 때 더욱 가중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816쪽에 43,000원(온라인 서점 38,700원)이라는 가격이 주는 무게감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 정도 분량과 값을 감당할 만한 책이다. 역자도 『광학적 미디어』를 번역한 윤원화 선생님이라 믿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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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1800


학자의 비극, 무대의 서막


독일 시문학Dichtung은 한숨과 함께 시작한다.


  아아! 이제껏 철학,

  법학과 의학,

  유감스럽게도 신학까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속속들이 연구하였도다.[354~357행]


여기서 한숨을 쉬는 것은 문장에 등장하지도 않는 이름 없는 '나'도 아니고, 하물며 이름 있는 저자는 더더욱 아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도입부를 이루는] 저 전통적인 크니텔시행의 음률을 가로지르는 것은 어떤 순수영혼이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또다른 고전주의 작가 실러의 시로 증명된다. '아아ach' 하는 한숨은 순수영혼이라는 독특한 존재 양태를 나타내는 기호로, 순수영혼이 다른 어떤 기표를 입에 올리거나―기표들은 다수로만 존재하므로―어떤 기표들이든 일단 입에 올리면, 그것은 저 자신을 위해 한숨 쉬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 이미 순수영혼은 더이상 영혼이 아니라 (실러의 이 시 제목이 명시하는바) '언어Sprache'가 되기 때문이다.


  어째서 살아 있는 정신Geist은 정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가?

  영혼이 말하면, 일단 말하기만 하면, 아아! 이미 더이상 영혼이 아니기에.


말이 새어나오는 곳마다 영혼의 타자들이 생겨난다. 학계의 직함 가진 자들, 교육자 행세하는 사기꾼들이. 파우스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그러나 지금 나는 가련한 바보일 뿐

  조금도 더 지혜로워지지 않았다!

  석사님 박사님 소리를 들으며

  벌써 10여 년이란 세월 동안

  위로, 아래로, 이리저리로

  학생들의 코를 잡아끌고 다녔을 뿐.[358~363행]


의학, 철학, 법학, 신학을 망라하는 대학의 담론이 이른바 '문예공화국'이라는 역사적 구성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쉰다. 문예공화국은 살아 있는 정신이 정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차단한다. 그것은 "박사니 석사니, 문필가니 성직자니 하는" (또는 더 정확히 의학자, 철학자, 법학자, 신학자라는) 모든 구성원에게 오로지 일생토록 읽기만 하면서 "벌레들이 갉아먹고 먼지가 뒤덮인 책더미" 속에서 "말의 소매상"이 되라고 명한다.[366, 402~403, 385행] 그리하여 파우스트 석사 또는 박사도 신간 하나 없는 서재의 "비좁은 고딕식 방"에 앉아서 책을 읽고 발췌하고 주해를 단다. 그러고 나면, 그는 오래된 책들이 불러준 내용을 다시 강단에서 자기 학생들에게 불러줄 것이다. 이것이 대학이 생기고 필사부筆寫部가 생긴 이래의 유럽식 학술 강의다. 구텐베르크의 활자는 여기에 거의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다. 문예공화국은 끝없는 순환이며, 생산자도 소비자도 없이 그저 말들을 회전시키는 기록시스템Aufschreibesystem이다. 여태껏 파우스트는 서재에서 필자, 창조자, 저자를 호명한 적도 없었고, 그 책을 이해하고 소화하고 처리하는 독자를 호명한 적도 없었다. 옛 문예공화국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을 갈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기록시스템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빈칸에 '인간'을 넣어보는 실험을 한다. 독일 시문학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파우스트는 "책상 앞 의자에 불안하게 앉아" 자기 서재에 쌓인 자료 더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호명한다. (...)


 - 프리드리히 키틀러, 『기록시스템 1800·1900』, 11~13쪽. 알라딘 미리보기를 통해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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