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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215

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의 (노고운 옮김, 현실문화, 2023)는 이제 너무나 상투적인 말이 되어버린 ‘기후위기의 시대’에 인간이 망쳐놓은 세상에도 어떻게 생명이 자라나고 생존할 수 있는지를 면밀하게 탐색한 민속지다. (보통은 작가거나 신문 기자, 편집자인) 눈 밝은 독자들이 이 책의 존재를 알아보고는 기꺼이 ‘올해의 책’으로 올려놓고 있다.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잠식당해 죽어가는 지구’라는 이미지에 절망하기보다, 폐허가 된 산업비림 속에서 더욱 잘 자라는 소나무와 공생하는 송이버섯(트리콜로마 마쓰타케)의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인간 대 비인간, 문명 대 자연이라는 이분법을 가로지르려는 서술이 그 어떤 대안보다 희망적으로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지은이는 ‘협력적 생존’이라는 말로 독자들을 송이버섯의 세계로 이끄는 .. 2023. 12. 25.
지배와 비지배 곽준혁의 (민음사, 2013)는 부제대로 마키아벨리의 또는 을 장별로 해설하는 책이다. 마키아벨리 전공자인 지은이는 우리가 마키아벨리의 사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를 깊이 있게 읽어야 하며 그 밖의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에게 또는 으로 알려진 ()와 , , 희곡 등을 주석으로 삼고 여러 연구자의 견해를 참고하며 를 꼼꼼하게 독해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책을 통해 에 대해 받는 인상은 당혹스러운 것이다. 거칠게 말해 는 ‘오독을 고의로 불러일으키는 텍스트’ 또는 ‘오독을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서두에서 제안했던 분류법에 따라 군주국을 분류하지 않았고, 서술에 있어서도 모순과 아이러니를 곳곳에 노출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 2023. 10. 9.
레닌을 회상하며 나데주다 꼰스딴찌노브나 끄룹스까야(크룹스카야)의 (최호정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1) 읽기를 마쳤다. ‘레닌을 추억하며’가 좀 더 제목으로 적절할 듯한 이 회고록은 크룹스카야가 레닌을 만나 평생의 반려이자 혁명 동지로서 살아온 삶을 기억에 의존해 쓴 것이다. 책은 원래 그녀가 레닌을 처음 만난 1893년부터 1907년까지를 다룬 제1부와 1908년부터 1917년까지를 다룬 제2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1918년부터 1919년까지를 다룬 제3부를 1933년부터 1938년에 걸쳐 덧붙임으로써 현재의 판본으로 출간되었다. 제1부가 제정 러시아의 억압적인 환경과 1905년 혁명을, 제2부가 1905년 혁명의 실패와 제1차 세계대전,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1917년 2월 혁명부터 10월 혁명 직전까지를.. 2023. 8. 15.
냉전의 지구사 오드 아르네 베스타의 (에코리브르, 2020)를 읽었다. ‘냉전’과 ‘제3세계’를 탁월하게 연결한 저작이다. 지은이가 밝힌 대로 1970~1980년대의 제3세계 지역에 집중한 것도 옳은 선택으로 보인다. 민족해방의 열기가 어떻게 해방된 사회의 건설로 이어지지 못했는지를 더없이 잘 보여주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탈냉전’과 ‘신냉전’이라는 레토릭이 역사와 현실을 오히려 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전은 전후체제와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았다. “‘훨씬 더 강한’ 초강대국(물론 힘의 제한은 있었지만)과 다른 초강대국 간 대결(646쪽)”이었던 시기로서 냉전은 끝났다. 하지만 ‘자유의 제국’(미국)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제3세계 전반을 조정하려는 경향과 그로부터 비롯된 개입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 2023.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