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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9

조금 늦은 전주영화제 관람 영화 단평 4/29(일) W. G. 제발트의 동명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라 했다. 거치대에 놓였을 카메라는 미동 없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는 관광객을 비춘다. '다크 투어리즘'의 원조라 할 만한 이 수용소를 찾아 온 다양한 관광객을 지그시 바라보는 카메라는, 역사의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우슈비츠를 들고 나는 이들을 그렇게 바라만 보았다. 한 테이크가 하나의 시퀀스가 되는 단순한 구조다. 더위에 지쳐 느릿느릿 돌아다니는 관광객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사운드는 통제되어 있었다. 파이프를 탕탕 두들기며 떨어지는 물소리는 테러와 고통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처럼 들린다. 같은 유태인의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선발되고 일이 끝나고 나면 처형당해 열세 번이나 바뀐 존더코만도, 그들 중 13기가 일으킨 1944년의 .. 2017. 5. 4.
천만 관객 영화의 미학은 없다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7.25) 천만 관객 영화의 미학은 없다 영화의 관객성 분석을 통해 관객의 정치적 주체성을 탐색하다 요즘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만 같다. 우리는 집에서 VOD로, 길거리에서 태블릿 PC와 스마트폰으로 얼마든지 영화를 볼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천만 관객 영화’에 대한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굳이 극장을 찾지 않더라도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우리가 어째서 굳이 극장을 찾는 것일까. 그만큼 천만 명의 관객이 보는 영화에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극장에 모이는 천만 명의 ‘무리’는 대체 누구일까. 거기에서 어떤 정치적 주체성을 탐색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 2016. 7. 26.
지젝을 배반해 지젝을 구원한다?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4.28) 지젝을 배반해 지젝을 구원한다?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영화 비평에 대한 이론적 전환을 제안하다 슬라보예 지젝은 난해하기로 악명이 자자하지만,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신랄한 문체 때문에 독자 대중에게 ‘철학계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알려진 철학자다.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했던 시기에 이른바 ‘부르주아 철학’를 전공한 지젝은, 헤겔 철학과 라캉 정신분석학이라는 두 사유체계를 서로 연결해 마르크스를 새로이 읽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지젝은 급진적인 사유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고 저 악명 높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갱신하려 한다. 김서영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의 「지젝의 정신분석적 영화 비평에 나타난 문제점 및 이론적 지평.. 2016. 6. 20.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그리고 워크래프트 1. 존 르카레의 (열린책들, 2005)를 읽었다. 1963년도에 나온 이 '모던 클래식'은 냉소적 반공주의자가 쓴, 냉소적 반공주의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007과 더불어 현대 스파이의 이미지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는 이 소설은 분명한 적대의 선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스파이를 보여준다. 지금 봐도 여전히 세련된 이 소설은 정치적 감상주의를 간결하고 냉소적인 문체로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의 미덕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공산주의(자)는 적대와 광신의 다른 이름으로 동원될 뿐이다. 르카레의 최근 소설이 갈수록 나이브해진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다. 그건 적대의 선이 사라진 탈냉전 시대에 그의 정치적 감상주의가 처한 자연스런 귀결이 아닐까 억측을 해본다. 2. .. 2016.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