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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42

현대성의 경험 근대(modern)라는 말은 이제 낡고 고루한 말이다. 그렇다고 포스트모던(post-modern)이 근대의 자리를 차지한 것도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지금은 여전히 '현대'로 인식되지, 근대도 포스트모던으로도 인식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시장의 트렌드로 소비되었을 뿐이고, 근대는 역사적으로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되는 탓이다. 무수히 생성되고 파괴되는 역사. 모더니스트 마샬 버만의 (윤호병, 이만식 옮김 / 현대미학사, 1994)은 책이 출간된 1982년을 배경으로 약 200년에 걸친 모더니즘의 역사를 풀어냄으로써 당대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모더니즘 공격을 방어한다. 그로부터 20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 투쟁의 기록 자체도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그럼에도 작품은 묻는다. 모더니즘의 시대는 정말로.. 2009. 9. 19.
유토피아 얇은 두께와 간결한 번역에 방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차. 읽히기는 술술 읽히되, 이건 흡사 무공비급을 눈앞에 두고 그림만 쫓다 뜻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몸짓만 따라하는 수준이 아니었나 싶다. 새삼 고전(古典)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린 것만은 아니다. 옮긴이 주경철이 지적했듯이 하나의 유력한 개념이 하나의 책으로부터 나온 경우가 드문데, 이 책은 한 개념의 기원인 동시에 그 개념에 대한 편견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의 지적 난장이 그 위에 덧씌워지면서, 다층적인 텍스트는 독자를 꿈의 세계로 이끌어 끊임없이 농락하는 것이다. (토머스 모어, 주경철 옮김 / 을유문화사, 2007)는 '이상향' 혹은 '낙원'의 대명사인 '유토피아'라는 말을 처음으로 제시한 책이다. 1516년 출간된.. 2009. 8. 27.
인간의 조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다른 걸 다 떼어놓더라도,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철학의 오랜 화두는 그것이 풀리지 않았으므로 유효하다. 사실상 철학의 테마 대부분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것들을 사유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물론 생물학과 심리학이, 혹은 그의 교접들이 인류의 미스터리를 거의 독해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주장들도 있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이진우, 태정호 옮김 / 한길사, 2002)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그것을 새삼 인간이 지구 위에 발딛고 있음에서 찾는다. 책이 출간되었던 1958년의 상황-구 소련이 위성을 쏘아올리는 데 성공하고, 원폭으로 전 세계가 멸망할 수 있다는 묵시론적 위기감이 팽배하던 당시-을 떠올린다면 인간이 지구 밖을 나서는 상상이 단순히 아이디어의 차원이 아니.. 2009. 7. 30.
로마혁명사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승자의 사관들은 이 명제에 충실하게 승자의 콧대를 세우고, 패자의 무릎을 꺾어 이를 후세에 전하고 싶은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은 승자의 오만과 기만을 대번에 꿰뚫어보았다. 동시에 이들은 종종 무기력해서 역사에 대한 자신의 절망과 회의감을 말과 글로 밖에는 풀어내지 못한다. 때문에 조조의 역사에 저항한 유비의 역사가 살아숨쉴 수 있었고, 프랑코 독재권력과 싸운 인민전선의 까딸루냐가 기억에 새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패자의 역사가 승자의 역사보다 빛나보이는 이유는 당대에 대한 회한 때문일 게다. 로널드 사임의 (로널드 사임, 허승일, 김덕수 옮김 / 한길사, 2006)는 로마 제국 격동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로마 공화정.. 2009. 6.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