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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2010년 첫 달의 책 얘기

by parallax view 2010. 1. 25.
0. 흘러 넘칠 듯 했던 시간을 거진 흘려보내고 나서야, 시간의 소중함을 떠올리는 지금의 나는 별 수 없는 게으름뱅이다. 이미 지난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읽고 생각하고 써 제낄 뿐.

1. <혁신의 리더들>(강우란, 박성민 / 삼성경제연구소, 2009)의 저자 강우란은 런던정치경제대학(런던정경대, LSE)에서 조직행동과 노사관계학을 공부했다. 솔직히 LSE에서 공부한 사람이 바라보는 조직론, 리더십은 어떤 것일까 하는 다소 추상적인 기대에서 읽었고, 당연히 기대는 소리없이 흩어졌다.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혁신의 모델을 자꾸 해외에서 찾지만(아이폰, 구글 등), 멀리 볼 것 없이 혁신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만도의 브레이크 코너 모듈, 대웅제약의 코엔자임Q10, 한국야쿠르트의 윌 등 이른바 '혁신제품'과 제품제조 과정을 수집해 소개하고 이를 네 가지 리더십 유형-CEO 리더십, 팀장 리더십, 비공식 리더십, 공유 리더십-으로 분석한 뒤, 마지막으로 통합 리더십이라는 콘셉트로 정리하고자 한다.

리더십 분석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비공식 리더십이다. 기존의 조직구조 안에서는 CEO나 팀장의 그늘에 가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통 직원들(대부분 전문기술자라는 점에서 '보통' 직원이 아니긴 하다.)이 몇몇 경우,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프로젝트에 헌신하는 걸 넘어 일의 특정 국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사례가 도드라진다.

권조훈 책임연구원은 대규모 프로젝트에서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몇 명은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안 나온다면 그 프로젝트는 실패해요. 큰 방향은 팀장이 잡지만 실제 개발에 들어가면 일이 원래 의도한 방향대로 착착 안 되거든요. 실패한 프로젝트를 들여다보면 문제를 미리미리 잡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공통점이에요. 기술적 한계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리더는 진척률을 챙기지만 왜 진척이 잘 안 되는지, 개개인이 봉착한 문제가 무엇인지, 그것이 프로세스 앞단과 뒷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다 알기 힘들어요. 비공식적인 몇 사람이 그 일을 해줍니다." (p.144-145)

하지만 정성적으로 접근한 사례분석은 리더십의 결과를, 그것도 성공사례만을 보여줄 뿐 제품이 나올 수 있는 토대까지 잘 설명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각 기업의 혁신사례를 다른 기업에, 심지어 같은 기업의 다른 프로젝트에 응용하기도 쉽지 않다. 어떤 사례는 수 년에 걸쳐 진행되었고(포스코의 파이넥스 공법), 어떤 사례는 성공이라고 포장하기엔 결과를 단정할 수도 없는 것 같다(삼성물산의 두바이버즈). 서론과 각 챕터의 리더십 설명 내용이 사례분석에서 거듭 반복되는 것도 마이너스 요소. 다만 내게는 SERI를 읽는다는 것이 SERI를 넘어서는 것의 시작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던져준 책.

2.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피터 싱어, 함규진 옮김 / 산책자, 2009)를 다 읽은 즈음, 마침 아이티 강진과 비욘태 님 아프리카 자원봉사(leopord, <후원, 하지 않겠는가>) 등으로 기부에 대한 체감도가 부쩍 높아졌다. 실천윤리학자인 피터 싱어는 독자들에게 기부 행위를, 남들은 이제 지겹다 하는 그 당위로 정말로 부지런히 설파한다. 기부에 대한 반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실험을 통해 반증하는 작업 저변에는 당장 1달러가 모자라 우물물을 길어먹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곤 하는 아프리카(및 저개발국) 빈민들에 대한 연민이 깔려있다. 그래서 글 속에서 드러나는 피터 싱어의 어조는 차분하지만, 사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빨리 눈 앞의 독자들이 인터넷 모금함을 클릭하길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듯하다. '적당한'(즉, 독자가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만큼 적당하다는 의미에서) 기부금액을 설정하는 후반부에 들어서기 전까지, 아니, 그 후에도 그는 독자가 오늘 G마켓에서 본 황정음 어그부츠를 살 돈을 기꺼이 기부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 열망이 무척 강하게 느껴져서 어중간하게 리버럴한 나로서는 거부감마저 든다. 어찌 보면 capcold 님이 비판하는 지사정신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피터 싱어는 기부자의 기부행위를 공개하여 자랑하도록 하고, 급여에서 기부가 자연히 빠지도록 하는 디폴트 옵션 도입을 권하는 등 당위나 도덕심을 넘어서 다른 여러 가지 방법에 호소한다.

번역이 깔끔하고 바지런해 저자의 원문은 어떨까 새삼 궁금하다. 기부의 당위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를 독려하는 여러 방법론을 고민한다는 점에서도 별 이론이 없다. 문제는 책의 구성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 책의 타겟은 이미 월드비전을 통해 해외아동 1:1 결연을 하고 있고 소득의 상당 부분을 기부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자신은 아직 기부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책은 당신의 호주머니를 당당히 털어가려고 하는 책이다. 그걸 불편해할 만큼 당신의, 그리고 나의 세상은 편안하다는 것을, 세상의 어떤 곳, 사실 많은 곳은 그런 불평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3. <넛지>(리처드 탈러, 캐스 선스타인, 안진환 옮김 / 리더스북, 2009)는 2009년의 주요 베스트셀러였다(이명박이 여름휴가 때 들고 다녔다고 알려진 바로 그 책!). 금융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고 안도의 한숨들을 내쉬는 지금에도 합리적 개인과 이기적 동기가 시장에서의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행동(행태)경제학의 인기는 계속될 것 같다.

넛지nudge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는 뜻으로, 이 책은 선택 설계자choice architect의 관점에서 기업의 마케팅 뿐만 아니라 연금제도 같은 정부 정책과 결혼제도에, 알람시계 같은 일상의 사소한 개선들까지 두루 살피고자 한다. 어떤 정책이나 상품 생산, 더 나아가 가장 중립적으로 보이는 건축물마저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은 적절하다. 공중화장실(남성용) 변기에 파리 모양을 그려넣음으로써 오줌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하는 아이디어는, 사소하지만 직관적인 변화가 생활환경 및 삶의 질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전망을 제공한다. 인간은 완벽히 합리적인 이콘icon이 아니며, 제한된 합리성과 불안정한 자기절제력, 그리고 타인의 말과 행동 등 사회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때문에 경제적인 인센티브나 가능한 많은 정보의 제공만으로는 적절한 선택을 유인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선택 설계자는 인간들에게 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무척 실용적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책은 지루함을 피할 수 없는데, 행동경제학의 몇 가지 명제를 증명하는 도입부를 넘기고 나면 미국의 401(k) 플랜(미국의 노동자 연금제도) 같은 사례분석이 거듭되기 때문이다. 사례를 모아 귀납적인 결론을 도출한 게 아니라, "약간의 넛지를 가하는 것만으로도 개선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연역적으로 관철하려는 것만 같다. 또, 미시적인 관찰과 개선시도를 넘어 지나치게 사소한 데 집착한다는 인상도 풍긴다(아무리 저자들이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이 책을 마케팅 등 경영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보통이겠지만, 탈러와 선스타인이 말하고 싶은 바는 공공정책인 것 같다. 즉,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정부)이 관료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또, 관료주의에 경도되었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시민들에게 보다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넛지를 제공할 능력과 의무가 있다는 걸 직·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필로그에 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전세계적 금융위기를 언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게다. 탈러는 401(k) 플랜의 이론을 제공했고, 선스타인은 오바마 정부의 규제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오바마(민주당) 정부의 공공서비스 제공능력을 간접적으로 응원하는 셈이다.

다만 저자들이 본문을 통해 몇 가지 반론에 대한 방어를 펼치고 있지만, <넛지>는 여전히 상당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 미국적 실용주의 사고에서, 그리고 리버럴liberal(역자는 거듭 '자유주의'로 번역하는데 그건 엄밀한 구분이 아니다.)의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보다 선한 것'에 대한 가치판단은 '미국인의 상식'에 제한되어 있다. 이 때 무엇이 보다 선한 것인가? 넛지를 가한다는 것, 저자들이 말하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를 시도한다는 것은 가치판단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다는 걸 가정한다. 해제를 쓴 최정규 경북대 교수(<이타적 인간의 출현> 저자)가 지적한대로 넛지를 가할 수 있는 상황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사소한 배려와 미시적인 해결책은 상상 이상의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지만, 거시적인 환경 변화 전부를 설명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한다. 또, '좋은 방향' 자체에 대한 의문에 답하는 데 한계도 있다(그건 행동경제학자의 역할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행동경제학의 고민거리를 방관하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미국의 좌우파 공히 잘 활용하길 바라며 글을 맺는다. 이들이 말하는 '제3의 길'은 중위자 투표이론median voter theory(정치가들은 양당제 아래서 보다 많은 득표를 위해 정치적 포지션을 중도로 잡고, 유권자들도 자신의 정치적 선호에 맞는 후보를 고르다 보면 중도 정치인을 선택한다는 이론)에 편향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비판의 여지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정책의 구상과 결정 및 실행에 있어 배려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만도 없을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우리나라 민주당 캠프의 대선 캠페인 능력을 끌어올리지 못했듯이, <넛지>도 그 자체만으로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수행능력을 끌어올리지는 못할 게다(일단 4대강 개발에 어떤 넛지를 넣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로봇 물고기를 포함해서 말이다.). 한국 좌파는 넛지 개념을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까. 책이 던져주는 고민거리는 딱 그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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