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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차가운 벽

by parallax view 2009. 1. 24.
후임 사제가 전임 사제의 목에 '황금가지'를 꽂아죽인 뒤 새로운 사제-왕으로 등극하는 고대 로마의 의례는, 그 의례의 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함께 이야기라는 모습을 빌어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다. 신화와 연극과 시로 버무려진 고대 제의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주었다.

소설은 인간을 해부한다. 소설이 언제 발명되었는지는 몰라도,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고 싶은 욕망은 항상 존재해왔다. 고대 제의가 제 형태를 잃고 망각되어가면서 그 역할은 소설이 대신했다. 소설 역시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런 해석은 소설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당의정으로 바라보는 측면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문학 그 자체의 밀도와 완성도에 집착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와 같은 경향 속에서 현실에 대한 자각과 비판을 중시하는 모더니즘 문학이 태동한다. 트루먼 카포티의 작품집 <차가운 벽>(박현주 옮김, 시공사 / 2008) 역시 모더니즘 시대의 소설이다. 문체의 간결함과 완성도로 승부하는 그의 스타일은 현대 독자들에게 친근할 법하다. 그는 오드리 헵번 주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을 썼고, 세계 최초의 팩션이라 불리는 <인 콜드 블러드>로 일약 미국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랐다. 그가 <인 콜드 블러드>를 집필할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카포티>도 나올 정도로.

작품집 <차가운 벽>에 들어있는 단편들은 저마다 간결한 문체와 인물·사건 등 소설 소품의 정갈한 배치를 기본으로 한다. 첫장을 장식하는 <차가운 벽>(1943)은 가장 짧은 소설로, 짙은 녹색의 방이 내뿜는 차가운 이미지와 여자의 냉정함을 엮어 타인 간의 소통불가능을 역설한다. 단편 중에는 <자기만의 밍크코트>(1944)와 <할인판매>(1950)처럼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도 있는데, 사실 <할인판매>는 <자기만의 밍크코트>의 재생산에 지나지 않는다. 중상류층 여성의 권력과 허영을 상징하는 모피코트를 사이에 둔 거래를 통해 그들의 허위와 정신적 빈곤을 비웃는 듯한 카포티는 이 문제의식을 미국의 상류층으로 확장해 <모하비 사막>(1975)을 쓴다. 애정이 왜곡된 상태로 유지되는 상류층 부부의 이야기는 카포티가 일생일대의 역작이 될 거라고 자부했던 <응답 받은 기도>의 초고인 셈이다. 그러나 상류층에 대한 고발을 담은 <응답 받은 기도>는 <인 콜드 블러드>의 성공으로 상류층에 편입되었던 카포티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의 부자 친구들은 카포티가 자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길 원치 않았고, 쫓겨난 카포티는 결국 원고를 완성하지 못한 채 약물과 알코올 중독, 뒤이은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2005년에 출간된 이 작품집(The Complete Stories of Truman Capote)의 서문을 쓴 레이놀즈 프라이스는 카포티의 소설에서 미국 남부 작가들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진술한다. 남부 농촌의 소박한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은화단지>(1945)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단편들은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남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환각과 몽환이 겹치면서 카포티의 문체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추억이 깃든 남부를 벗어나 대도시 생활을 해야만 했던 카포티 본인의 경험과 겹치면서, 작품 속 뉴욕은 낯선 자들의 도시이자 꿈이 현실이 되는, 혹은 현실이 꿈에 불과한 도시로 변해간다. 이 모호한 경계 위에 그의 대표 단편 <미리엄>(1945)과 <마지막 문을 닫아라>(1947)가 자리잡고 있다. 우연히 마주친 한 소녀가 악몽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미리엄>과, 거짓말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지는 한 남자를 그린 <마지막 문을 닫아라>(1947)의 몽환성은 남부를 가로지르는 기차속에서 혼란에 사로잡히는 예민한 소녀의 이야기 <밤의 나무>(1945) 등 현대 환상문학 스타일의 작품들과 엮여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 환상성은 꿈을 사고파는 관계를 파헤치는 <불행의 대가(大家)>(1949)에서 정점에 달한다.

다른 작가들과 비슷하게, 카포티 역시 창작의 샘물을 과거라는 우물에서 길어온다. 그에게 있어 유년시절은 더없는 행복이었고 축복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코믹한 상황설정과 함께 드러나는 <생일을 맞은 아이들>(1948)을 지나, 카포티는 자신만의 원질신화(Monomyth)인 어린시절로 접근한다. 연작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긴 해도, <크리스마스의 추억>(1956),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1967), <어떤 크리스마스>(1982) 모두 그의 앨라배마 농촌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여기서 부모의 이혼으로 버려지다시피 했던 카포티를 돌봐준 유일한 친구, 그의 늙은 사촌 숙의 사랑과 추억은 그를 살아있게 해준 유일한 힘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들 세 작품 모두 그녀에 대한 헌사라 불러도 좋다. 다시 부모에게 돌아간 몇 년 후 숙이 죽었을 때부터, 카포티의 내면에 감춰진 결핍은 이후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 같다. 단순히 부모의 이혼이나 어머니의 정서불안의 문제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소설가는 종종 자신에게 결핍된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글을 쓰곤 하는데, 카포티 역시 그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항상 심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트와 기지가 살아있다. 한 남자가 어거지로 장가갔다 못된 이모들의 괴롭힘에 못된 장난으로 응수하는 <내 쪽의 관점>(1945)이나, <꽃들의 집>(1951)에서 못된 시할머니에게 복수하는 여자의 모습은 마치 옛날 동화에서 마귀할멈에 기지로 맞서는 소년소녀들을 보는 것 같아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여기에 역자의 수고와 애정이 겹친 높은 수준의 번역이 카포티의 문체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1984년 카포티가 약물중독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미국 문학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편집 <차가운 벽>은 간결함과 기지를 겸비한 문체의 힘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동시에 그의 내면에 새겨진 상처와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감정의 실마리도 드러내고 있다. 다음은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의 한 장면이다. 버디(카포티의 어린시절 이름)를 못살게 구는 소년이 숙의 초대로 추수감사절 만찬에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소년은 숙의 카메오 브로치를 훔쳤고, 이를 본 버디는 저녁식사자리에서 소년을 고발한다. 숙은 소년을 감싸주었지만 소년은 사실을 시인하고 자리를 떠난다. 숙이 자신을 배반했다고 생각한 버디는 창고에 숨어 친구를 원망하지만 다시 화해한다. 그 때 숙이 소년의 어깨를 감싸면서 했던 말이다.

"내가 해두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 버디. 잘못한 사람에게 잘못으로 갚는다고 올바른 행동이 되는 게 아니란다. 그 애가 카메오 브로치를 가져간 건 잘못이지. 하지만 우리는 걔가 왜 브로치를 가져갔는지 이유를 모르잖니. 어쩌면 아예 가지고 갈 생각은 아니었는지도 몰라. 이유가 뭐였든, 계산한 행동은 아니었잖니. 그래서 네가 한 행동이 훨씬 더 나쁜 거야. 너는 그 애를 망신 주려고 작정을 한 거니까. 고의였잖아. 내 말 좀 들어보렴, 버디. 세상에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딱 한 가지가 있단다. 일부러 잔인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 다른 모든 건 용서받을 수 있단다. 하지만 그것만은 안 돼. 내 말 알겠니, 버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차가운 벽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나의 점수 : ★★★★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집. 간결한 문체 속에 담긴 절제된 감성. 힘이 느껴지는 문장들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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