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해슬럼의 <전쟁의 유령: 국제공산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우동현 옮김, 아르테(북이십일), 2024)은 부제대로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기지였던 코민테른(Comintern, Communist International)에서,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코민테른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특히 영국)의 대응에서 찾는 책이다.
지은이는 소련 외교사와 국제관계사의 전문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사이, 이른바 ‘전간기(interwar period)’라 불리는 1920~1930년대를 냉정한 시선으로 살핀다. 그가 보기에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뒤이어 탄생한 신생국 소련이 자신들을 크게 위협한다고 느꼈고, 그로부터 비롯한 적대감과 혐오, 공포는 국가의 외교 정책부터 외교관들의 선호까지 (비록 ‘이해관계’라는 현실정치의 제약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상당히 결정할 만큼 폭넓게 퍼졌다. 이는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혁명가들(볼셰비키)이 1919년 코민테른(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유럽과 아시아의 혁명 운동/반식민지 운동을 지원한 데 기인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이 봤을 때 소련은 국가 대 국가로서는 현상유지(status quo)를 내세우지만 각국 내의 혁명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국가 전복을 꾀한다는 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외교 관행을 어지럽히는 존재였다(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북한의 ‘화전양면전술’이라는 비난으로 익숙한 현상이기도 하다).
해슬럼은 이 책에서 기존 소련 외교사와 국제관계사 연구자들이 이념의 존재를 괄호 친 채 이해관계에만 집중하거나, 당대의 반공주의 역사관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할을 축소하는 식으로 대응해온 것을 비판한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념, 특히 영국 지배계급의 보수주의가 전간기의 반공주의로 현상하고, 지배계급의 뼈 속 깊이 스며든 반공주의가 어떻게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을 용인했는지, 심지어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파시스트와 나치를 동쪽(러시아)에 대한 방벽으로 선호하기까지 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다(물론 지은이는 구소련과 공산주의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으며, 현재 ‘민주주의 국가들’이 겪고 있는 혼란 속에서 공산주의 같은 이념이 또다시 나타나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종말론적 비관을 피력한다).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미국, 스웨덴, 에스파냐, 러시아의 문서보관소를 두루 살펴 전간기 외교관들의 의식과 관념, 서로 간의 오해와 억측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전쟁의 유령>의 특장점이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잘 알려진 (영국의 엘리트 구성원이자 소련의 스파이였던) ‘케임브리지 파이브(Cambridge Five)’의 활약(?)이 소련 외교에 미친 영향도 가늠하게 해준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박만섭 옮김, 휴머니스트, 2024)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협상인 파리평화회의와 협상의 결과인 베르사유 조약이 또 다른 전쟁을 예비하리라고 신랄하게 지적했다면(케인스는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핵심은 독일을 사실상 식민지로 만드는 데 있었다), <전쟁의 유령>은 케인스 역시 공유했던 영국 엘리트들의 반공주의와 독일을 향한 유화주의적 태도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낳은 주 요인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쟁 위기로 들끓던 전간기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전쟁의 유령’ 배후에 ‘혁명의 유령’ 또는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의 첫 번째 문장에 나오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있음을 강조하는 이 책이 지금 여기에서 쓰이고 옮겨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금의 시대가 또 다른 전간기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민주화된 지 37년이 지나 이제 더 이상 쿠데타 같은 건 없으리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12.3 내란은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함을, 한국은 언제든지 군사독재로 돌아갈 수 있음을, 상식은 너무나 쉽게 깨질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아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 체제가 건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느 것도 확정적이지 않다. 기후위기와 불평등, 극우 포퓰리즘과 가짜뉴스가 일상을 위협하고 있음을 절감하는 시대다. 이 한 권의 책이 모든 것을 알려줄 수는 없을지라도, ‘전쟁의 유령’을 퇴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탐색하는 데 실마리가 되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