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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의 낮잠 : 적대와 정치

by parallax view 2014. 12. 15.

『변증법의 낮잠』 (서동진, 꾸리에, 2014)


  『변증법의 낮잠』은 '변혁'이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세계를 다룬다. 그러니까 거대한 변화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니 우리의 문제를 올바른 제도와 정책을 통해 수정, 보완하거나 작은 공동체를 꾸려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안분자족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세계 말이다. 그런 삶의 지향이 그리 멀지 않다는 건 금세 알 수 있다. 


  페이스북만 해도 그런 모임이 넘쳐 난다. 대안적인 삶을 꿈꾸며, 혹은 거대 서사에 신물이 난 사람의 꿈을 담은 각종 기관과 단체가 페이스북 그룹에 이름을 올린다. 그런 모임이 시시하다거나 별 것 아니라고, 결국 지자체의 예산이나 구성원의 변덕스런 인간관계에 좌지우지될 뿐인 무력하고 취약한 조직에 불과하다고 비웃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난처함은 그런 무력하고 취약한 조직에서 더 나가려 하지 않는 우리의 무력함에 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거대 서사라는 것조차 제대로 생산해 본 적 없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사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박가분 같은 이는 거대 서사를 '사상'이라고 바꿔 말할 것이다). 서동진의 『변증법의 낮잠』은 그런 점에서 우리 주변에서 희미하게 맴도는 변증법이라는 유령을 소환하고, '두 제곱하는 사유'(제임슨)를 재개하자고 제안한다. 나는 그의 화려하고 까다로운 글을 두고 낮은 가독성을 탓하기보다 그것이 변증법이라는 '서사'를 직조하려는 일종의 투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대안이 뭐냐" 같은 치사한 질문에 구차하게 "우리에겐 이런저런 대안이 있소이다" 라고 설명할 것이 아니라, 잠깐 멈춰서서 "당신은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하는 투쟁 말이다. 


  『변증법의 낮잠』에서 관건은 정치와 경제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사유하고 구성할 것인가에 달렸다. 정치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 유권자의 투표로 국회의원이 대의하는 것도, 올바른 정책을 만들어내는 기술적인 과정도 아니라는 것. 또한 경제는 신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과 같이 구분되는 것도, '살림살이 경제'와 같은 방식으로 자본주의 이전에 있었던 '경제' 자체를 구상하는 것도 될 수 없다는 것. 요약하자면 정치와 경제라는 서로 포개질 수 없는 영역은 자본주의를 둘러싼 시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와 경제가 그 자체로 허상이라는 것은 또한 아니다. 경제는 정치의 가능성을 형성하며 또한 정치를 가로막는 장애라는 점에서 늘 선차적이다. 하지만 경제를 바꾸는 것은 결국 정치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아래와 같은 글이 이런 말장난 같은 말에 대한 변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존의 분석적 유형의 논리적 추론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런 '말장난'이야말로 변증법적 방법의 본질 자체이다. 정태적 합리성의 눈에는 하나의 추문거리겠지만 변증법적 방법의 내적 운동은 형식적 개념과 그것이 나온 역사적 현실 사이의 필수적 연관을 극화한다. 따라서 문체 일반이라는 추상적 관념은 그것이 애당초 표현하는 대상이었던 현대 문체의 구체적인 역사적 현상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바로 문체는 역사적 현상인 까닭에 그에 관한 절대과학(absolute science)은 불가능하다. 

 - 프레드릭 제임슨, 『맑스주의와 형식』, 388쪽


  말하자면 오늘날 탈역사화된 자본주의를 다시 역사화하는 노력, 그것이 변증법이며, 더 나가자면 저 악명높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될 것이다. 우리가 처한 난처함을 돌파하기 위한 무기를 벼리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첫번째 시도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