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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an Vital

정말 뻔뻔한 글은 무엇인가

by parallax view 2010. 10. 19.
(존칭생략) RNarisis의 <한겨레21의 '뻔뻔한 기사'>만 읽고는 한계가 있어서, 원문이 실린 한겨레21 832호를 읽었다. "한-미 FTA 이후, '징징'은 '뻔뻔'으로?"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결국 재협상에 들어갔다. 외교통상부는 지난 10월 10일 보도자료를 내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브뤼셀에서 열린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서명 행사에 참석한 뒤 귀국길에 미국 요청에 따라 7일 오후(현지 시각) 파리에서 드미트리어스 마란티스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와 비공식 협의를 했다"고 밝혔다.

(…) 이를 두고 정치권은 갑론을박 중이다. 현재 체결된 한-미 FTA를 조속히 비준하자는 쪽(한나라당·자유선진당)과 한국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줄 수 있는 한-미 FTA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민주노동당)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또 다른 한쪽(민주당)은 재협상을 하되 독소조항을 없애자는 주장과 기존대로 처리하자는 주장이 섞여 있다."

그 외의 이야기는 RNarsis가 요약한 내용과 같다. 단, 두 가지가 누락되어 있다. 하나는 'e스포츠 진흥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한 쪽 의원인 허원재 의원이 한나라당 소속이라는 것과, 블리자드가 한국에 소송걸 수 있는 근거가 한미FTA의 투자자-국가소송제라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정부와 여당은 국내 e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기존 저작권법에 예외를 두려고 한다. 한국은 국내 제도가 지적재산권 제도와 충돌할 때, 그 동안에는 해외 저작권자가 권리를 주장하기 힘든 구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한미FTA가 발효된 뒤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블리자드가 한국 정부·여당의 e스포츠협회 지원을 자산에 대한 수용으로 간주하고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에 제소할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논점은 투자자-국가소송제를 포함한 한미FTA를 발효하려는 정부와 여당이, 한미FTA로 인해 차질이 빚어질 예외 조항을 만들고 있다는 모순에 있다. 그런데 왜 정부·여당이 아니라, 기사를 게재한 언론에 화풀이를 하는 건가? 게다가 정부의 'e스포츠 이노베이션 2.0' 계획은 e스포츠 업계의 분쟁이 단순히 기업간 갈등의 양상을 띄지 않으리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기사 내용을 다시 인용한다.

"올해부터 5년간 정부 예산 320억원을 비롯해 지자체 예산, 기업 후원 등 590억원을 e스포츠에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스타크래프트>가 저작권에 발목이 붙들릴 경우 e스포츠의 발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런 상황에 주목하면서 갈등 조정과 법안 처리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부·여당의 문제는 한미FTA와 e스포츠 진흥 계획을 별개로 접근한다는 데 있다. 한미FTA로 인한 파급효과를 정확히 파악이나 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운 상황 아닌가. 더구나 e스포츠 진흥계획에는 국민의 세금이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e스포츠협회와 블리자드 사이의 갈등 해소만큼, 진흥 계획이 실제로 유효한지, 그것이 또 다른 파급효과를 가져올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 RNarsis는 입법 주권 운운이 과장이라는 식으로 몰고 간다. 기사에서 송기호 변호사가 한 말은("FTA가 발효되면 국회가 만든 법이 해외 투자자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으면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에 제소될 수 있어 입법 주권이 훼손되는 결과를 낳는다.") 한미FTA에 위배되는 입법 활동 자체에 제약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 아니다.

한 마디로, 한미FTA는 한국의 정책자율성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하는 데 반해, 정부·여당은 이에 대한 자각 없이 기존 관행대로 저작권법에 대한 예외 법안을 만드려고 한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언론이기 때문에 자기 필요한 자료를 가져다 반대의 근거로 사용한다는 비난이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한겨레21을 매도하지 않았나. 달을 가리켰더니 손가락이 삐뚤어졌다고 욕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RNarsis의 지난 글은 이글루스 유저들이 지재권에 예민하다는 점을 이용해, 한겨레21을 "지재권 개념도 파악 못하는 멍청한 언론"으로 만드려는 프레임 공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 나는 RNarsis가 한미FTA가 비준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RNarisis, <오랜만에 노빠 인증해볼까?>).

정부가 취약해졌기 때문에 한국 기업의 비상식적인 관행을 외부의 변화를 통해 해소해야 한다? 이 주장은 세 가지를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1. 정부는 기업을 견제할 능력이 없다.
2. 해외 기업이 국내 기업보다 효율성도 높고 제도도 합리적이다.
3. 국제적인 통상 압력을 통해 '국제 규격'에 맞는 기업 관행을 만들 수 있다.

이 세 가지 전제 모두 기각된다. 왜냐하면 여전히 정부는 행정권을 보유한 권력 기구로서 시장을 규제하고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기 시절 노무현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선언은 선언으로 그칠 뿐이다. 정확히는 임기 중에 시장에 대한 견제 의지를 포기했다고 봐야 하지 않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의 문제다.

두 번째 전제를 보자. 과연 해외 기업이 국내 기업보다 반드시 효율적이고 합리적인가. 지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도화선으로 글로벌 경제 위기가 팽창했을 때 이른바 선진 기업들이 보여준 행태(AIG 임원들이 구제 비용을 성과금으로 지급받은 사례 등)를 생각해 보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나.

가장 허황된 건 세 번째다. 외부의 압력을 통해 국내 기업의 행태를 바꿀 수 있다면 굳이 FTA를 할 필요도 없다. 삼성, LG, 현대 등 대기업이나 기술 관련 중소기업들이 '세계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 기업들과 경쟁 및 협력 관계를 맺고 있지 않나. 그런데 과연 이런 대기업들은 글로벌 마인드로 바뀌었는지? 물론 글로벌 마인드를 표방하고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걸 모토로 삼고 있고, 몇몇 경우에서는 성과도 보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조직 문화가 한국 기업들에 팽배해 있지 않은가.

한미FTA는 단순히 자유무역을 하면 모두가 잘 산다는 내용이 아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하나의 게임이다(물론 완전한 제로섬 게임은 아니다.). 문제는 정부가 잃는 부분에 대해 얼마 만큼 주의를 기울이고 있고, 또 국민경제 단위의 상실분을 어떻게 보상할 것이냐다. 정부는 농업 문제에 대해, 지재권 문제에 대해 얼마 만큼 준비하고 있는가. 게다가 단순히 경제학적 문제만 아니라 문화와 생태를 포함하는 광범한 변화를 불러온다. 경제학적 계산에 밀려 이런 부분들이 너무 쉽게 간과되어 오진 않았는가.

또, 정부는 한국의 정책자율성이 훼손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지금까지는 e스포츠협회와 블리자드 사이의 분쟁이 기업간 갈등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한미FTA가 비준된 뒤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한겨레21 기사는 이 지점을 짚고 있는 것이다. 정작 비판해야 할 정부와 여당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언론에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는 지금의 행태가 몹시 불편하다.


추. 하지만 e스포츠협회의 공공성 드립에는 나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월드컵은 중계권이 없단 말이냐? -_-?

사진 출처 :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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