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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대한민국 표류기

by parallax view 2009. 3. 20.
처음 허지웅 블로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가 마초인 줄 알았다. 알았다, 가 아니라 정말로 마초였지만, 그가 생각하는 마초와 내가 생각하는 마초 사이엔 말이 풀 뜯어먹는 시간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소녀 허지웅이라니, 참내, 이런 인간 치고 꼴마초 아닌 놈 없더라. 냉소부터 날리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가 <20대가 사라졌다><광장에 대중문화가 사라졌다>에서 보여준 순발력과 재치와는 정반대의 이미지였달까. 남성성이란 놈과 재치란 놈이 전선에서 마주 보며 따다다다 따발총을 날려야 할 이유란 딱히 없었는데도, 그의 블로그속 이미지에는 어딘가 작위적이고 악의적인 데가 있었다. 솔직히 그가 이 정도로 유명한 줄도 몰랐고, 유명해질 줄도 몰랐다. 허지웅이란 이름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허지웅의 <대한민국 표류기>(허지웅/수다, 2009)는 현역 영화기자이자 블로거의 자기반성문이다. 반성문이라기보단 반역문 혹은 반골문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집안이 망하면서 곧바로 세상과 마주할 것을 강요한 환경은 그에게 고통을 안겨준 동시에 그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강렬한 동기였다. 그러나 허지웅은 그걸 홍정욱마냥 승리의 밑천으로, 성공의 장식으로 과시하길 거부한다. 그가 책을 낸 목적은 뚜렷하다. "조금 덜 부유하고 조금 더 가난하게 사는 것."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살고 싶고 또 살고 있으니 나를 한 번 지켜보라는 것.

온라인 글쓰기가 오프라인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무척 많은 글이 출판되고 있다. 그러나 거개가 원본의 카피에 불과한, 더군다나 굴림체가 명조체로 넘어가면서 느껴지는 모호한 위화감을 다 떨치지 못한 불완전한 글이다. 블로깅이 하나의 트렌드가 된 지금도 그 점에선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외양만 조금 세련되게 꾸몄을 뿐, 글의 내면에 대한 고민이 없어보인다. <대한민국 표류기>가 출간되었을 때, 책이 포스팅의 카피에 불과하다면 읽을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책이 잘 팔린다는 것은 좌파로서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단순히 유명세를 탄 덕분이라면 그야말로 하나의 패션에 불과하다는 걸 고백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글을 다듬고 또 다듬었겠지만, 아쉽게도 <대한민국 표류기>에서 포스팅 이외의 새로운 글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블로그를 한 번 더 본다는 기분에 오히려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따금 대체 허지웅이 왜?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게 읽히는 글들이지만, 이런 글 쓰는 거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글은 날카롭지도 않고 맹렬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그의 분노가, 격정이 느껴진다. 그런데 불쾌하지가 않다. 에세이 뿐만 아니라 글이란 알게 모르게 글쓴 사람을 드러낸다는 걸 떠올린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허지웅의 글이 아니라 허지웅 그 자체라는 걸 떠올린다.

그의 글에선 간혹 박민규의 냄새가 난다. 아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허지웅의 글에는 너구리 게임을 통해서만 세상의 질서에서 일탈할 수 있는 다크서클 너구리들의 슬픔이, 대한민국 야구사 최고의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자들의 애환이 있다. 책을 여는 글로서 보무도 당당히 찌질함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고시원으로부터 온 편지>는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연상케 한다. 스타일 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고루 닮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애써 닮고 싶어했다기보다는 너무나 어쩔 수 없이 닮아갈 수 밖에 없는, 반골들의 KS마크 때문인지도 모른다. 뜨거움은 거기서 나온 것일게다. 따끈하게 달궈진 KS마크가 팔뚝에 푹 찍힐 때 그의 몸에 새겨진 가난과 고독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팬티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피조차 식지 않을 듯 거듭 뜨겁다. 이렇게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을 듯한 저력이 있다.

동시에 그가 호소하는 지독한 고독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연애의 궤적과 얽혀 독자를 힘들게 한다. 맨정신으로 이런 연애는 도저히 거듭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연애라는 게 하다보면 집착이 된다는 걸, 고통이 된다는 걸 몸으로 겪었다면 마찬가지로 몸도 마음도 뜨거워진다. 도대체 이 인간은 판타스틱4의 파이어라도 된단 말이냐. 개인의 고통은 그러나 사회의 고통과 공존하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집어삼키지 않는다는 데에 허지웅 글의 미덕이 있다. 그는 거듭 말할 뿐이다. 속지도 말고 비웃지도 말고 그냥 움직이세요. 누구를 위해서도 말고 자신을 위해, 자신의 주머니를 위해 움직이세요. 그럼 조금은 나아질지도 몰라요.

허지웅이 쓴 글 중에 글쓴이조차 방황하는 것이 느껴지는 <다크나이트, 고담에선 모두가 정의를 원한다>를 제외하면 그의 영화평은 대개 근사하다(맞다. <다크나이트>에는 말로선 다 표현하지 못할 것들이 너무 많다.). 아마도 책보다 영화를 더 많이 보았을 그이기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의 긴장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그이기에, 지치고 힘들어도 여전히 영화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할 것 같은 그이기에 믿음이 간다. 최소한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그렇다.

이 모든 글은 결국 허지웅이란 사람 한 명에게 수렴한다. 동시에 그의 글은 같은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20대 혹은 동년배들에게 어떤 스펙트럼을 발산한다. 스펙트럼의 결이 고른지 어떤지 아직은 모른다. 닮고 싶고 따라하고 싶은 것인지 어떤지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허지웅은 살아있고 여전히 뜨겁고 끊임없이 분노한다. 그는 오늘도 글을 쓰거나 인터뷰를 따거나 술을 먹거나 연애를 하거나 할 것이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너무 노골적이고 내밀해서 오히려 더욱 보편적인 보통의 존재. 그가 묻는다. 이건 당위가 아니라 질문이다. 조금 덜 부유하고 조금 더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표류기>는 그래서 현재진행형이다.


대한민국 표류기

허지웅 지음 / 수다
나의 점수 : ★★★★

허지웅. 내부와 외부의 기록.
이 이야기는 현재진행중이오니 이용에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