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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지성사란 무엇인가?

by parallax view 2022. 6. 13.

리처드 왓모어의 <지성사란 무엇인가?: 역사가가 텍스트를 읽는 방법>(이우창 옮김, 오월의봄, 2020)은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를 케임브리지 학파의 언어맥락주의적 접근을 중심으로 개괄하는 입문서다. 언어맥락주의(linguistic contextualism)는 거칠게 말해, 특정 사상가의 사유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저작이 어떤 의도와 맥락에서 쓰였는지를 동시대의 논쟁을 비롯해 담론/사상의 지적 계보와 함께 살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J. G. A. 포콕과 퀜틴 스키너, 이슈트반 혼트 등이 대표하는 케임브리지 학파의 작업은 (프레드릭 제임슨 식으로 말하자면) 1960~80년대 역사학의 '노동분업'의 주요 사례다. 이들은 이른바 '정치사상', 특히 17~18세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집중한다(얼핏 포콕의 <마키아벨리언 모먼트>를 예외로 들 수 있겠지만, 그 책 역시 마키아벨리와 르네상스기 피렌체의 '시민적 덕성'이 어떻게 잉글랜드 내전과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지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저자가 여러 번 강조하는 대로 대표적인 저작이라고 봐야겠다).

 

저자는 지성사가를 골동품 수집가 정도로 격하하거나 현실정치와 유리되어 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에 줄곧 저항한다. 그러나 역사가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연구 대상과 방법론의 선택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케임브리지 학파의 작업이야말로 현실정치와 밀착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란 세련된 보수주의로, '휘그주의'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진보사관과 '마르크스주의'가 상징하는 급진주의 진보사관 모두와 대결하면서 '사상/관념의 다양한 전통'을 옹호한다고 할 수 있겠다(그들의 보수주의는 저자가 프랑수아 페늘롱의 귀향 담론에서 마오주의의 오류로 도약하고, 의도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사례로 프랑스혁명의 공포정치를 드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사상사' 또는 '관념의 역사'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케임브리지 학파의 지성사는 거대 서사에 대항하고 특정한 사유의 발생과 소멸을 담론의 지형 안에서 탐색한다는 점에서 미셸 푸코의 작업과 겹치는 면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저자가 2장 '지성사의 역사'에서 간략하게 기술했다).

 

"《지성사란 무엇인가?》의 중심주제 중 하나는 사상사 연구가 현재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실천적인 의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지성사가들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켜 역사 연구를 순수하게 골동품적인 취미생활로 만든다는 비판은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공격이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지성사가들은 역사 속의 행위자들이 직면한 선택 중 다수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강조한다. 에드워드 기번, 애덤 스미스, 그리고 함께 계몽의 시대를 살았던 여러 동료 지식인들이 사상사에 남겨놓은 눈부신 학문적 업적 중 하나는 그런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최초의 행위자들이 의도했던 바와 달리 나타나게 되었는지 탐색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지성사가들이 바로 그러한 전통의 계승자들이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 한국어판 저자 서문, 8~10쪽

 

원서는 폴리티 출판사(Polity Press)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 시리즈 중 하나로, 180쪽의 얇은 분량이 특징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저자의 개론을 보충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도입한 것이 눈에 띈다. 한국 독자에게 낯설 내용은 역자가 옮긴이 주로 꼼꼼하게 해설했고 '옮긴이 주 찾아보기'를 삽입해 원서의 '더 읽어보기'를 보충했다. '옮긴이 해제'는 언어맥락주의의 역량을 과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한국 독자 입장에서 케임브리지 학파의 지성사 연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안내를 제시하려는 열성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