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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사회주의 최초의 비극에 대하여

by parallax view 2013. 7. 8.

당대의 비평가들은 대숙청 시기의 음울함을 따라 플라토노프의 글이 비관적이고 반동적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낙관성조차 보이지 못하는 오늘날에 비하자면 백 배는 긍정적이다. 그러니까 변증법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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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안드레이 플라토노프가 서른다섯 살이던 1934년은 그의 생애에서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그는 『코틀로반(구덩이)』과 『체벤구르』―이 두 소설이 오늘날 가장 유명하다―를 이미 썼지만 온전하게 발표된 작품이 하나도 없었다. 대다수의 소련 독자들은 플라토노프를 단편 몇 편을 쓴 작가로 기억했다. 더구나 집단화(collectivization)를 풍자한 「미래의 쓸모를 위하여」의 경우 1931년 발표되자마자 당국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플라토노프는 그 후로 3년 동안 어떤 글도 출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1934년 봄에 작가 부대의 일원으로 투르크메니스탄에 파견됐다. 소비에트화의 진척을 보고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플라토노프는 같은 해에 일련의 연감(年鑑) 작업에도 투입됐다. 막심 고리키(Maksim Gor'kii)가 편집을 총괄한 그 연감은 1937년이 끝나는 제2차 5개년 계획을 축하하는 기획이었다. 하지만 그 연감은 결국 발행되지 못했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연감의 일부로 쓰인 것으로, 제목은 「수첩」이다. 「수첩」은 1935년 1월 초에 고리키의 책상에 도착했다. 1935년 1월이라면 세르게이 키로프(Sergey Kirov)가 암살당하고부터 한 달 후로, 이 사건은 대공포 시대(Great Terror)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련의 숙청 작업의 서막이었다. 고리키는 며칠 만에 플라토노프의 원고를 반려했다. '부적합'하고 '비관적'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3월 초에는 작가회의 총무가 그 미발표 원고를 '반동적'이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사회주의를 적대하는 분자들의 철학이 담겨 있다"는 고발이었다. 

  이 글은 1934년 전반기에 쓰였을 것이다. 플라토노프가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온 후로 추정된다. 4월 중순에 적힌 한 수첩―「카라쿰 사막이 빚어내는 자연의 변증법」―을 보면, 플라토노프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카라쿰 사막이 가장 핵심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다. 수첩의 많은 부분에서 『행복한 모스크바』의 걱정과 관심사가 직접 거론된다. 『행복한 모스크바』는 그가 당시에 쓰고 있던 소설이다. 구체적 사실들은 「아버지-어머니」라는 시나리오에도 다시 사용됐다(NLR, No. 53 참조). 이 글은 다른 무엇보다 고리키의 자연관을 반박한다. 1932년의 한 논설에서 고리키는 이렇게 읊조렸다. "대지는 무한한 보고(寶庫)를 그 어느 때보다 활수(滑水)하게 우리에게 드러내 보일 것이다." 플라토노프는 1920년대 초에 고향 보로네즈(Voronezh)에서 여러 차례 가뭄을 겪었고, 수문학(hydrology, 水文學)을 연구하면서 고리키와 완전히 다른 개념을 갖게 됐다. 그는 과학기술에 대한 믿음과 인류가 기대고 사는 혹독한 환경에 대한 지식을 결합했다. 「사회주의 최초의 비극에 대하여」는 플라토노프의 작품 세계 전체에서 이색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포괄적으로 얘기해, 이 기사는 그가 쓴 다른 많은 저널리즘적 글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보로네즈 시절(1921~26년)의 저술이 보다 선동적이라면, (1937년 이후의) 문학비평은 무엇보다 미학적 질문들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 자체로 철학적인 내용은 매우 드물다. 물론 사후 6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완전한 목록이 작성되지 못한 작품고에서 더 많은 글이 튀어나올 수는 있지만 말이다. 수고(手稿) 상태의 이 글이 러시아어로 최초 출판된 것은 1991년이다. 타자기로 작성된 두 번째 버전은 1993년에 나왔다. 고리키가 읽었을 두 번째 버전은 소련 '공학자들의 영혼'이 직면한 문제들을 훨씬 더 강조한다. 여기 실린 번역문은 플라토노프의 최초 수고를 옮긴 것인데, 마찬가지로 간명하고 예지력이 돋보인다. 



  우리는 자중하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 흥청망청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더 좋지만 더 심각하고, 진지한 시대인 것이다. 흥청망청하는 자는 누구라도 집착으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덫에 기어들어가 발판 위의 돼지기름을 '탐닉하는' 쥐처럼 말이다. 우리 주변에는 돼지기름이 많다. 그러나 모든 게 미끼이자 유혹이다.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사회주의의 과업을 수행하는 보통 사람들과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그래, 그것이다.

  이런 태도와 의식은 자연이 조직되는 방식과도 일치한다. 자연은 위대하지 않다. 자연은 풍요롭지 않다. 누구도 자연의 풍요로움과 위대함을 누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연은 가혹하고 난폭하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보라. 역사 시대에 걸쳐 자연은 남김없이 약탈당하고, 낭비되고, 엄청나게 소모됐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을 흥청망청 낭비해가며 뼛속까지 발라 먹었을 것이다. 언제나 욕망이 넘실댔을 것이다. 물질세계에 단 한 가지 법칙―변증법이라는 근본 법칙―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불과 몇 세기 만에 세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사실을 보태야 하리라. 사람들이 없었다 해도 자연은 저절로 파괴됐을 것이다. 변증법은 아마도 인색함이 표현되는 방식이리라. 자연의 무자비한 조직 방식은 위압적이다. 오직 그 덕택에 인류의 역사 발전이 가능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오래전에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사탕을 쥔 아이를 떠올려보라. 입에 넣고 달콤함을 즐기기도 전에 손아귀에서 녹아 빠져나가는 사탕의 허무함을.

  우리가 처한 당대의 역사적 풍경은 과연 어디에 놓여 있을까? 우리 시대가 비참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진정한 역사적 과업이 전 지구적 차원이 아니라 작은 영역에서만, 그것도 과부하가 걸린 채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과학기술이 … 모든 것을 좌우한다"라는 진술이야말로 진실이다. 정말이지 당대 역사의 비극은 과학기술을 주제어 삼아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집합적 생산수단뿐만 아니라 사회구조까지 과학기술을 프리즘으로 하여 파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구조는 생산기술에 확고하게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런 상황은 심지어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 말 그대로 '위에서'가 아니라 사회가 이데올로기를 자각하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정확히 말해보자. 우리는 과학기술에 과학기술자를 포함해야 한다. 사람 말이다. 그래야 사안을 무정하게 파악하지 않을 수 있다.

  과학기술과 자연의 관계는 비극적인 상황이다. 과학기술의 목표는 이런 것이다. "내게 설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달라. 그러면 지구를 움직여 보이겠다." 하지만 자연은 그 구조상 통제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렛대를 들고 필요한 절차를 거쳐 지구를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 긴 지렛대로 지구를 돌려놓는다 해도 그 승리는 무익하다. 이것은 기초적인 변증법 얘기다. 우리 시대의 사안을 하나 예로 들어보자. 원자를 쪼개는 일 말이다. 똑같다. 우리가 원자를 부수는 데 n의 에너지를 들여 n+1의 에너지를 얻는 세계사적 순간이 올 것이다. 우리는 그 초라한 성과에 희희낙낙할 것이다. 겉으로 보면 자연법칙을 인위적으로 변화시켜 완전무결한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변증법적이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한다. 자연은 같은 방법으로 대갚음하거나 심지어 모종의 유리함을 도모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상황을 거꾸로 돌려놓으려 애쓴다. 변증법이 우리한테서 외부 세계를 보호하는 것이다. 역설처럼 보이지만 그렇다. 자연의 변증법은 과학기술에 가장 크게 저항하는 인류의 적이다. 과학기술은 자연의 변증법을 전복하거나 누그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과학기술이 지금까지 거둔 성공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세계가 우리에게 여전히 우호적이지 않은 이유다.

  우리가 무분별하게 흥청망청하다가 일찌감치 소멸하는 것을 막아주는 유일한 지침과 방편은 변증법뿐이다. 온갖 과학기술을 낳은 힘이 변증법이기도 했다.

  사회현상에서, 사랑에서,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변증법은 정말이지 변함없이 작동한다. 열 살짜리 아들을 둔 한 남자가 아들과 아내를 버리고 어떤 미녀와 결혼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그리워했고, 어리석게도 목을 매 숨졌다. 한 편의 작은 쾌락은 다른 한 편의 엄청난 비탄으로 상쇄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이의 목에서 밧줄을 끌렀고, 이내 아들을 좇아 자살했다. 그는 무고한 미녀와 한껏 즐기고 싶었다. 그는 여성과 책임을 나누는 형태가 아니라 쾌락으로서 사랑을 원했다. 흥청망청하지 말라. 그랬다가는 죽는다.

  일부 순진한 사람들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현하의 생산 위기를 보면 이런 관점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대의 제국주의와 파시즘은 고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사회 기관이다. 그런 사회의 인류가 굶주림과 파괴에 직면해 있다. 갖은 비용과 희생을 치르고서 생산력을 증대시켰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파시즘과 국가들이 벌이는 전쟁으로 인한 자멸은 고도 생산력의 실패이자 복수다. 비극의 매듭은 풀리지 않으면 잘리는 법이다. 그 결과는 고전적 의미의 비극이 아닐 것이다. 소련 없는 세상이 다음 세기 안에 저절로 붕괴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계와 심장, 자연의 변증법으로 무장한 인간의 비극을 우리 조국은 사회주의라는 수단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방심할 수 없는 중대한 과제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의 '표면'을 탐험한 그 옛날 사람들도 기본적 힘과 물질들이 방출되고 폐기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속에서 우리의 길을 만들고 있다. 마찬가지다. 세계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를 똑같이 압박한다. 


『뉴레프트리뷰 4』, pp.423-427, 정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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