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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운동사

by parallax view 2011. 1. 13.
『안티조선 운동사』(한윤형 / 텍스트, 2010)를 말하기 전에 밝힐 게 두 가지 있다.

첫째, 나는 조선일보에 나온 적이 있다. 2002년, <독자만화대상>의 1기 멤버로서 홍보 활동의 일환으로 조선일보 취재에 응했다. 당시 나는 '운동권'이었지만, 한총련과 점점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만화 운동에 몸과 마음이 모두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이 또한 '운동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정리글을 올려볼까 한다). 안티조선 운동이 한창이던 때였음에도, 나는 '안티조선'이라는 구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솔직히 말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병행하던 청소년 참정권 운동에서는 "왜 조선일보에 나왔느냐"는 질책도 들었다(우습게도 나는 모 대학 학보와 한겨레에 만18세 참정권 운동가로 취재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무지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무지보다 더 부끄러운 건 따로 있었다. 조선일보에 사진이 박힌 것 때문에 온 일가친척들이며 학과 사람들까지 나를 '조선일보에 나온 만화 운동가'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야 조선일보의 파급력을 깨달았다.

둘째, 조선일보에 대한 지금 나의 포지션이다. 나는 언소주 활동을 지지하며 조선일보 구매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종의 대조군이자 타산지석으로서 조선일보를 탐색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조선일보를 반대하기 위해서는 조선일보를 알아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즉, 구매는 피하되 온라인 구독까지 막아선 안 된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사서 보지 않는다고 해서 조선일보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책에서도 지적되었듯 광고에 대한 신문의 의존도가 높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실구독자 수가 신문의 존속에 미치는 영향은 거대 언론사일수록 작다(진성당원 수에 대한 한나라당-진보신당 간 차이와 비슷하다). 한겨레와 경향은 상관성이 비교적 높다고 볼 수 있지만, 이들조차 토건 광고 때문에 관련 비판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건 조중동의 종편 문제 및 언소주의 활동과 연결될 만한 꺼리이지만 여기서는 넘어가자.

글머리가 길었다. 조선일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조선일보도 안티조선도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안티조선 운동사』는 말 그대로 안티조선 운동의 역사를 기술한 한윤형식 정리글이다. 근대 한국사 연구자인 신복룡 선생은 역사를 서술하려면 한 세대(30년)가 지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강준만이 『김대중 죽이기』를 통해 (한윤형의 표현으로는) '광야에서 조선일보를 외친' 시기(1995년)를 생각해 보더라도 15년을 겨우 넘겼다. 그러나 인터넷 매체의 특성상 호흡이 짧고 빠르며, 시대 자체의 변화 속도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급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안티조선 운동을 말하기 이전에 한국 언론사를 요약 소개한 것도 장황한 감이 있지만 용인할 수 있다. 사건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한국 언론 운동의 연장선상에 안티조선 운동이 있었다는 입장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안티조선 운동을 중심에 둔 나머지, 언론 운동의 당연한 귀결 내지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과대해석한 감이 있다. 안티조선 운동은 여러 가지 변수가 있었기에 나타난(뒤집어 말해 그러한 것들이 없었다면 없었을) '실현된 가능성'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하고 '아흐리만'이라는 아이디로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한 한윤형에게 있어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정리글은 일종의 부채 청산인 듯하다. 한윤형이 책 속에서 즐겨 인용하는(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소설들로 빗대보자.『은하영웅전설』로 치면 율리안 민츠로, 『반지의 제왕』으로 치면 빌보의 '레드북'을 이어받는 프로도에 비길 수 있겠다. 그에게 있어 양 웬리 혹은 빌보 배긴스는 강준만이 아닐까(양 웬리라는 비유는 진중권에게 좀 더 어울리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김대중 죽이기』부터 시작해 조선일보를 언론 운동의 '주적'으로 설정해 안티조선 운동의 이론적·실천적 기반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티조선 운동은 '최장집 사건'(1998년)으로 촉발된 지식인들의 동참과 문학 권력 논쟁을 거치고 대중화되면서 양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여기서 한윤형은 운동사에서 벗어나 '노빠'의 인식론/존재론 분석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안티조선 운동의 지식인적 속성은 대중 운동으로의 확산에 장애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운동의 팽창 과정에서 운동 논리의 극적인 단순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운동이 성공한다는 것은 그것의 이념이 대량 생산되는 공업품처럼 찍혀 나와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는 말과 유사하다. 인터넷 화면에서 클릭 한 번 하면 상품을 구입할 수 있듯, 그렇게 운동은 '원 클릭 쇼핑몰'이 되어 사람들을 유혹한다. (p.152-153)

정서적으로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듯하다. 학력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한나라당 지지층에게는 우월 의식을 지니면서도, 지식인들의 기득권(?)을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게 했다. 이를테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무식하다고 공박하는 반민중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들이지만, 지식인들이 글을 알아먹게 쓰지 않는다고 인터넷에서 비난하는 민중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 즉 이들은 부르주아(자본가) 계급 의식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 의식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 '보통 사람'과 '상식'의 역할은 여기서도 분명했다. 여기서도 그들은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p.247)

나 역시 노빠의 멘털리티를 '공부하지 않는 지식인'과 '정서적 중도'로 분석하는 입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책이 표방하는 바가 '역사'인 이상,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탐색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한윤형은 서프라이즈 등에 올라온 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태도와 입장에 대해 논하기는 한다. 그러나 운동의 담론적인 측면과 사건들에 대한 기술에 치중한 나머지, 정작 안티조선 운동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에는 좀체 가닿지 못하고 있다. 단적으로, '3부 안티조선 운동의 성장'과 '4부 혼란에 빠진 안티조선 운동'에서 도드라지는 사람들은 여전히 홍세화, 진중권, 유시민, 노무현 등 '영웅캐'들이다. 주체가 곧잘 증발하고 글의 양적 축적이 오프라인에 비할 수 없는 온라인 게시판의 특성상 불가피한 부분은 있다. 내가 아쉬운 건 '살아남은 평범한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한편, 안티조선 운동은 담론 투쟁이자 정치 활동으로서 지극히 그람시적이다. 또, 레닌(주의)을 누구보다 싫어할 조중동과 노빠들 모두 담론 투쟁의 장에서는 철저한 레닌주의자였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안티조선 운동의 한계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안티조선 우리모두에서 좌파가 이탈하고, 서프라이즈가 동프니 남프니 하며 갈려나가는 데는 한국의 이념 지형이 강하게 작용한다. 물론 정치와 언론의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이들은 서로 견제해야 하지만, 언론의 이념적 색채 자체를 무화시킬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안티조선 운동은 지극히 '상식적인' 운동으로 출발했고, 당파성을 표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당파적인 운동이었다. 운동 주체들이 안티조선 운동의 당파성을 거세했을 때 운동의 역동성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즉, 안티조선 운동은 '상식'과 당파성 사이의 괴리로 인해 무너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안티조선 운동의 내외적 모순은 노무현 정부 시기와 2008년 촛불 때에도 반복된 듯하다. 대한민국 상식인의 입장에서 '순수한' 시민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덜 불편하고 온건해 보인다. 그러나 상식을 강조하다 보면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발산할 자리는 사라진다. 노무현 정부의 노동 정책이 그랬고, '촛불 시민'이 비정규직 투쟁을 외면한 것이 그렇다.

여기서 안티조선 운동이 안티테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언론다운 언론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 했다는 지적은 적절하다(히요, <교과서>). 언소주 활동에 대한 지지와 별개로, 나는 언소주 활동에서 보이는 방식 역시 '원 클릭 쇼핑몰'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가장 온건한 운동이랄 수 있는 소비자 운동마저 탄압과 방해의 대상이 되는 외적 조건이 원 클릭 쇼핑몰의 위험성까지 합리화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안티조선 운동과 뒤이은 언론 운동에 최소한의 의미가 있다면 '성찰하는 개인들'이 태어날 조건을 만들 가능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관심가는 주제는 '사이버 민중주의'다. 한윤형은 사이버 민중주의가 나타나는 이유를 정치적 채널의 부재에서 찾는다. '네티즌 수사대'와 '신상털기'로 상징되는 웹 생태계의 평등주의('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는 위기의 징후이자 온라인 언론이 활동하는 조건이다. 이는 블로그와 SNS로 다양화되는 웹 생태계에서 개인 언론이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건 웹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른바 '논객(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티조선 운동사』는 기술하는 주체의 측면에서 볼 때 무척 상징적이다. 『안티조선 운동사』는 강준만과 진중권의 리즈 시절에 대한 기록이고, 현재까지도 재생산되고 있는 온라인 토론술과 논쟁술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탐색하는 작업이다(더 파고들면 PC통신 게시판 시절까지도 들어갈 수 있겠다. 막상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 대한 분석이 적은 듯싶다). 동시에 안티조선 운동에 개입하고 관찰한 20대 필자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이 책은 '20대 논객'의 처음이자 끝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잠시 언론에서 회자되던 20대 논객론(?)이 어떤 배경에서 태어났는지를 가늠해볼 때, 『안티조선 운동사』는 20대 논객론의 소멸을 상징하고 있는 게 아닐까. 덧붙이자면, 책 중간중간에 『은하영웅전설』이나 『반지의 제왕』을 삽입한 것은 작가의 취향을 다분히 반영하지만, 굳이 넣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운동에 대한 (한윤형식) 정리는 여러 단점이 있긴 하지만, 온라인 운동에 대한 재조명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다(한편 한윤형의 글에서 느껴지는 노회함은 운동에 대한 회의주의에 바탕한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 남은 질문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한윤형 글이 품고 있는 회의주의를 넘어,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어떻게 관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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