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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베오울프 (닐 게이먼, 케이틀린 R.키어넌, 2007)

by parallax view 2008. 4. 21.

(스포일러 있음)

1. M

어렸을 때 동네에 M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속칭 '좀 모자란 아이'였던 그는, 그러나 여느 또래의 보통 아이들과 같이 일반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였지만)를 다녔다. M의 일상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보라고 무시당하는 건 예사. 그 고만고만한 아이들 틈에서 완력으로나 지력으로나 열세였던 그는 가끔 대소변을 잘 못 가렸고, 그예 곧잘 맞고 괴롭힘당했던 것이다. 그래도 M은 항상 웃으며 다녔다. 지금도 허허거리며 웃는, 그 바보스러운 웃음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M도 화를 낼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어느 날 반에서 여느 때처럼 그를 갖고 노는 아이들에게 "아, 그만 괴롭히라고!!!" 라며 큰 소리로 화를 내었다. 아이들은 잠시 멈칫했지만 그렇다고 그 날 이후로 괴롭히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지방에서 갈 수 있는 중학교란 동네에 몇 개 없었고, M과 나는 반배치고사(중학교에 들어갈 때 어느 반에 배치될지를 정하는 중학교입학시험. 생각해 보면 웃기지 않아?)의 결과였는지, 그냥 '뺑뺑이'의 결과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같은 학교에 들어갔다. M의 일상은 초등학교 때와 별 다를 게 없었다. 늘 놀림당하고 맞고 괴롭힘당하고... 아직 대가리가 덜 여문 애들은 힘으로 남을 제압하려 들었고, 대가리 좀 컸다 싶은 애들은 성적으로 남을 제압하려 들었는데, 나는 힘에서 당하는 쪽이었고 M은 두 쪽 모두에게 당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역시 약자였던 나는 M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를 비웃는데에 동참했다. M은 분명 '하바드'에 갈거라면서-당시 충남지역에는 '하바드 학교' 라는 특수학교가 있었다. 속칭 '저능아'를 모아서 교육시키는 그런 학교였다-애들끼리 농담을 낄낄거리며 지들끼리 "넌 걔랑 하바드나 가, 이 XX야" 따위의 말을 지껄이곤 했다.

그러다 중3 때, M이 오토바이 뒤에 탔다가 떨어져 도로를 굴렀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고, 비록 군데군데 깁스를 했어도 건강은 한 모양이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M에 대한 나의 기억은 그가 돌아오던 날, 예의 그 바보스런 웃음으로 끝난다. 고등학교에서 우리는 완전히 갈라졌고, 지금은 그의 소식을 더는 알지 못한다.


2. M과 그렌델

짐작했겠지만, 나에게 '베오울프'(닐 게이먼, 케이틀린 R.키어넌 공저 / 2007)는 M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렌델은 힘을 가진 M이었고, 그 역시 인간에게 조롱받는 괴물이었다. '물의 여인'의 자식이었던 그는 괴물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지만 감수성이 풍부했고, 어딘가 좀 모자란 구석은 있어도 언어를 이해했으며, 강인했지만 늘 고독했다. 트롤도 아니고 용도 아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닌 그것, 그렌델은 모든 향락과 타락의 궁전인 헤오로트 궁에서 들려오는 그 무수한 소음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지나치게 예민한 정신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어미와의 약속을 어기고 궁전에서 살육을 저지른다. 그가 원한 것은 침묵이었지만, 그 순간은 잠시일 뿐, 새로운 침묵을 위해서는 새로운 살육을 감행해야 했던 것이다.

침묵을 위해 포효했고 고독을 위해 살인을 했던 그렌델은, 덴마크에서 자신을 이길 자가 없다는 생각에 기고만장해졌다. 그러나 인간에게 공포를 줌으로서 자기를 보호했던 그의 권력은 그를 죽이려는 자들을 끊임없이 불러왔고, 결국 영웅 베오울프의 등장으로 그의 삶은 파국을 맞이한다. 그렌델의 죽음에 분노한 '물의 여인'은 베오울프를 파멸에 몰아넣기 위해 그를 자신의 소굴로 유도한 뒤, 기어코 용의 무덤에 나타난 베오울프를 유혹하고...

사실 그렌델은 덴마크 왕 흐로드가르의 분신이었다. 그의 그림자였고, 그의 어둠이었다. '물의 여인'이 왕국과 부와 명예를 댓가로 흐로드가르의 씨를 받은, 교환의 산물이었다. 외적을 정복하고, 성벽을 높이 쌓고, 성벽만큼 높이 보물을 쌓고, 환락의 집합체 헤오로트 궁을 지었던 왕의 이면이었다. 폭군의 욕망, 파괴와 공포로써 통치하려는 검은 야망. 하지만 그렌델은 자신의 운명과는 반대되는 삶을 위해 공포를 이용하다 결국 죽임을 당한 것이다. 영웅을 위해 죽임을 당하는, 하지만 그의 삶은 반영웅에 가까웠다.


3. 유전자의 복수

베오울프도 이 운명에서 빗겨갈 수 없었다. '물의 여인'과의 거래로 그 역시 덴마크의 왕위를 물려받고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지만,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어디선가 나타난 커다란 용이 왕국을 파멸로 이끈다. 이 용은 그렌델의 또다른 현신이었다. 그와 같은 배에서 나온 동생인 그는, 이전보다 더욱 완벽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강화된 그렌델이었다. 즉, '흐로드가르-그렌델'의 관계처럼 '베오울프-용'의 관계가 반복된 것이었다.

전설의 반복에 대한 작가들의 해석은 다분히 SF적인 것이었다. '유전자'를 댓가로 권력을 손에 넣은 흐로드가르와 베오울프는, 마찬가지로 '유전자'에 의한 복수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아들이 아비를 위협한다는 이 잔인한 이야기는 어딘가 오이디푸스적이기도 하다(아비인 줄 모르고 아비를 죽이고, 어미인 줄 모르고 아내로 맞이한 뒤 파멸하고 마는 오이디푸스 전설과, 거기서 영감을 얻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등). 여기서 '물의 여인'의 존재가 애매해진다. 우리의 마음에 늘 존재하는 시기, 질투, 욕심, 살의 이런 것들을 통틀어 욕망이라고도 하고, 어둠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꾸만 악행을 부추긴다고 본다면, 즉, 이런 인격화된 어둠을 우리는 '악마'라 부른다. '물의 여인'은 어쩌면 고대의 여신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지금은 잊혀진 '종족'일 수 있었지만, 소설 '베오울프'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자 '악마'였다. 원래 서사시였던 이야기에서 그렌델과 함께 '물의 여인'의 성격을 다시 만들면서 '물의 여인'이 원한 것이 단지 베오울프에 대한 복수였는지, 아니면 인간이라는 존재 일반을 유혹함으로써 끝없는 파멸로 이끌려는 '운명'인지가 불분명해졌다. 어쩌면 둘 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4. 우리의 그렌델은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베오울프는 흐로드가르와는 달리 자신의 악업을 이겨냈다. 영웅담이란 으레 그렇게 끝나니까. 한편, 그렌델 혹은 용을 우리 마음 속에서 찾는다면 '늘 존재하는 어두운 욕망'이 될 것이고, 외부에서 찾는다면 소외되고 억압당하지만 자신의 말을 가질 수 없는(사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조금 특별한 사람들일 것이다.

어제 세종로를 가로지르면서 '장애인의 날'을 맞아 거리로 나와 투쟁하던 장애인들을 마주쳤다. 검은 제복의 전투경찰들이 폴리스라인을 쳤고, 행진대오의 끄트머리에 붙은 경찰차가 "지금 여기서 행진을 멈추는 것은 불법입니다. 어서 신속히 행진을 계속하십시오" 라는 따위의 방송을 내보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을 앞에 두고 자신들의 언어를 알아먹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그들은 얼마나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까 생각하며, 한 때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그 바보스런 웃음이 잊혀지지 않는 나의 동창 M을 떠올렸다.



베오울프

닐 게이먼.케이틀린 R. 키어넌 지음, 김양희 옮김 / 아고라
나의 점수 : ★★★

서사시에서 소설로, 소설에서 영화로.
전설은 끊임없이 구전된다.

닐 게이먼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