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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4

뼈는 정신이다 그저께는 "거대한 이론을 창안하지 못해 안달하기보다 차라리, 코앞에 놓인 꽃의 냄새를 맡고 흘러가는 것들 그 자체의 무상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태도가 훨씬 낫다"고 썼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이론은 세계의 단순한 반영이나 '프레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의 조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론은 구체적인 사물과 현상을 통과함으로써만, 그런 왜곡과 오독을 거침으로써만 생산되며, 그 자체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하세가와 히로시가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에서 설명하는 바를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정신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거대한 이론에 집착하기보다 일상의 사물에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 이론을 말하지 않는 그 순간에도 사물.. 2017. 7. 9.
<작은 우주들> 단상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작은 우주들』(김운찬 옮김, 문학동네, 2017)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를 알아낸 것 같다. 그의 글이 노인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경계(트리에스테),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경계(안테르셀바)를 헤매면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군상을 그들의 복잡다단한 역사와 단조로우면서도 변화무쌍한 자연경관과 함께 조명한다. 이때 마그리스는 늙은이들을 거듭 소환한다. 온화한 늙은이, 소란스런 늙은이, 심술궂은 늙은이까지 가리지 않는다. 도나우 강의 도도한 흐름과 함께하는 『다뉴브』와 비슷한 스타일로 쓰였지만, 『작은 우주들』에는 그 제목 그대로 '작은 우주들microcosmi'에 대한 무한한 집착이 보인다. 죽어가는 것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나.. 2017. 7. 7.
죽음, 결속, 백색왜성 죽음은 매듭을 푸는 게 아니라 반대로 묶는다. 이는 사회적 결속 의례이자 구심력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밀도와 질량을 얻어 다른 사회구성원을 자기 주위에 끌어당기면서 붕괴하는 자그마한 별이다. -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안테르셀바」, 『작은 우주들』, 김운찬 옮김, 문학동네, 2017, 275쪽. ======================================= 마그리스의 말을 따르자면 죽어가는 사람은 백색왜성이다. 그/녀의 오그라든 육체는 주위로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을 곁으로 불러모으면서 육체는 더욱더 쭈글쭈글해지고 작아진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의 일이다. 백색왜성은 아름다운 비유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은유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다시금 .. 2017. 7. 7.
열병 같은 봄이 지났다 열병 같은 봄이 지났다. 여름에는 어딘가 이성적인 구석이 있다. 작열하는 태양에 감성이 타들어 가기 때문이라고 둘러대 본다. 쏟아지는 비가 잠시 몸을 습기로 뒤덮지만 그때뿐이다. 아직 여름휴가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일을 핑계로 미적대다 하루이틀 짧게 어딘가 갔다 오는 게 전부일 것이다. 아직도 몸은 여름방학을 기억하고 있는지 놀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딱히 방학이라고 해서 어디 멀리 갔다 온 적이 없기 때문에 허파에 헛바람만 들락날락한다. 올해의 절반은 제법 길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도로 어려졌다. 아직도 자신이 어른이라는 자각이 없다. 어른, 꼰대, 그런 건 되고 싶지 않지만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나이값을 하란 말이다" 라고 되뇐다. 이걸 줄여서 '어른'이라고 하는 거겠지... 2017. 7. 7.